사목영성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5) 11세기 ⑤ - 카르투지오회 영성
침묵 속 은수 생활로 하느님 안에 자유로움 찾아
2017. 10. 15발행 [1435호]
홈 > 사목영성 >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기사를 카톡으로 보내기 기사를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기사를 twitter로 보내기 기사를 facebook으로 보내기
▲ 카르투지오회를 설립한 브루노.



공주(共住) 생활에서 은수(隱修) 생활로 옮겨가는 방식을 택했던 카말돌리회의 수도 생활은 수도원과 은수처 상호 간의 명확하지 않고 느슨한 관계 때문에, 서로 대립하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되면서 긴장 관계 속에서 갈등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카말돌리회의 상황이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었겠지만, 비슷한 시기에 공주 생활과 은수 생활을 모아 놓은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수도 생활이 출현했습니다.



그레고리오 개혁 운동에 동참한 브루노

쾰른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브루노(Bruno Cartusiensis, 1030/32~1101)는 2005년에 개봉했던 영화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에 나오는 ‘카르투지오회(Ordo Cartusiensis)’를 설립했습니다. 쾰른(Kln)에서 학업을 시작했던 브루노는 프랑스 랭스(Reims)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긴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쾰른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브루노는 1056년쯤 다시 랭스 주교좌성당 학교로 돌아왔으며, 이듬해에 학장이 되어서 거의 20년 동안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또 브루노는 랭스 주교좌성당 참사 위원도 겸직했습니다.

랭스에서 지내는 동안 브루노는 그레고리오 개혁 운동이 쇄신하고자 했던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부도덕한 생활을 바로 눈앞에서 경험하면서 그레고리오 개혁 운동의 지지자이자 버팀목이 되어 갔습니다. 1067년 랭스대교구좌가 공석이 되자 마나세(Manasss de Gournay, 재임 1069/70~1080/1081)는 성직 매매의 방법으로 랭스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이후 교회의 재산을 노골적으로 사유화했습니다. 따라서 주교좌성당 학교 학장이었던 브루노를 비롯하여 교구 구성원들은 마나세를 비판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했고, 마나세 역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위협을 느낀 브루노는 1076년에 잠시 쾰른으로 피신했습니다. 보다 못한 랭스에 성 레미(Saint Remi) 수도원 수도자들이 이러한 사태를 교황청에 고소했고, 마나세가 수도자들을 파문함으로써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습니다. 결국 1077년에 교황 특사가 마나세를 이단자로 파문했으며, 1080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PP. VII, 재임 1073~1085)는 그를 면직시켰습니다.



침묵 속에서 은수 생활 실천하는 공동체 설립

교황대사와 교구민들은 브루노를 랭스대교구의 차기 교구장으로 추천했으나, 브루노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수도 생활을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특히 세상을 등지고 독거 은수 생활을 실천하고자 했던 브루노는 1082년 2명의 동료와 함께 세셰 퐁탠(Sche-Fontaine)으로 이주해 몰렘의 로베르투스(Robertus Molesmensis, 1028~1111)에게 조언을 받으며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브루노 일행은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 범위 안에서 다른 수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은수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브루노는 개별적으로 더 엄격하게 실천하는 은수 생활을 원했습니다.

1084년 브루노는 6명의 동료와 함께 그르노블(Grenoble)로 이주해 그레고리오 개혁 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던 그르노블의 주교 후고 1세(Hugues de Grenoble, 재임 1080~1132)가 제공한 샤르트뢰즈(Chartreuse)라는 험준한 산속 골짜기에서 경당 및 그 주변에 은수처를 짓고 엄격한 은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브루노는 일행과 함께 6년 동안 이집트 사막 은수 생활을 본받아 고독, 청빈, 금욕과 함께 기도, 묵상, 노동을 행하면서 침묵 속에서 은수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오늘날 브루노가 설립했던 수도회를 카르투지오회라고 부르는 것도 정착했던 곳의 지명인 샤르트뢰즈의 라틴어 표기 카르투시아(Cartusia)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1090년 과거 주교좌성당 학교 시절에 제자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PP. II, 재임 1088~1099)가 도움을 요청하자 브루노는 동료였던 라누이노(Lanuino, ?~1116)에게 수도원을 맡기고 로마로 가서 교황의 자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은수 생활을 바랐던 브루노는 1092년 교황에게 간청해서 허가를 얻어, 시칠리아 영주 로게리우스(Rogerius de Altavilla, 재위 1071~1101)가 제공한 칼라브리아(Calabria) 지역 토레(Torre)에 성 마리아 수도원을 설립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1094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수도원 성당을 축성했습니다.



수도원 안 독방에서 은수 생활 실천

브루노가 사망하기 몇 달 전인 1101년 교황 파스칼리스 2세(Paschalis PP. II, 재임 1099~1118)는 카르투지오회의 생활 방식을 인가했습니다. 브루노는 수도 규칙을 정한 적도 없었고, 수도 규칙서를 저술한 적도 없었습니다. 브루노는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할 생각이 없었으며, 다만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실천한 공간으로 수도원을 건설했을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 수도 서원과 같은 서약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브루노는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을 수정하여 기본적인 생활 규범을 제시하면서 침묵 속에서 고독한 은수 생활을 강조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근 수도자들마저 이러한 수도 생활 방식을 따르려 하면서 고유한 수도 생활 방식으로 인정받으며 정착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제5대 원장이었던 귀고 1세(Guigo de Castro, 재임 1109~1136)가 1127년 저술한 「관습법」(Consuetudines)이 카르투지오회의 첫 번째 규정집이었습니다.

카르투지오회 수도자들은 수도원 안에 독방에서 은수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수도원과 은수처가 구분되어 있던 카말돌리회와도 달랐으며, 공주 생활을 실천하는 베네딕도회와도 달랐습니다. 세상과 단절되어 침묵 속에서 고독한 은수 생활을 실천하던 수도자들은 성경 말씀과 함께 영적 독서를 실천하면서 관상 기도에 깊이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또한 수도자들은 독방에서 은수 생활을 실천하면서도 세상과 영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성경 말씀을 연구했고, 필사했으며, 사람들을 위하여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카르투지오회 수도자들은 한 수도원 안에 살면서도 공동 시간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수도자들은 미사 전례 거행에서 생략할 수 있는 요소들은 최대한 생략해서 전례를 단순화시켰습니다. 성무일도를 바치기 위한 시간 전례에 있어서도 단순하고 소박한 가운데 경건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들은 전례 안에서 성모 마리아가 현존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심을 발전시켰습니다.

카르투지오회는 오늘날까지 한 번도 수도회를 개혁해 보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보존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즉, 브루노가 생각했던 대로 침묵 속에서 고독한 은수 생활을 기꺼운 마음으로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카르투지오회 영성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기사를 facebook으로 보내기 기사를 twitter로 보내기 기사를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기사를 카톡으로 보내기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이전뉴스 다음뉴스 추천 목록
 
발행일자
지난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