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 (22) 조선 신자들에게 첫 번째 편지 보내
“조선 신자 여러분들과 살다 죽기 위해 곧 가겠습니다”
2017. 09. 17발행 [14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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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 조선 입국로의 첫 기착지인 중국 복안까지 75일간의 항해 끝에 도착했다. 사진은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복안 전경.

▲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 조선 입국로의 첫 기착지인 중국 복안까지 75일간의 항해 끝에 도착했다. 복안은 16세기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래된 곳으로 지금도 많은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 남경교구장이며 북경교구장 서리인 페레이라 주교는 흠천관 관원으로 북경 추방을 면하고 북경교회를 지킬 수 있었다. 사진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황제에게 서양 문물을 소개하고 있는 중국 TV의 한 장면.



“여러분의 소원이 드디어 이뤄졌습니다. 천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자비로우신 천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선교사들과 주교 한 명을 보내십니다. 이 특은을 받은 자가 바로 저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살다가 죽기 위해 곧 출발합니다. 여러분의 왕국에 유럽인을 맞아들이면서 생겨날 어려움 때문에 겁내지 마십시오. 하느님께 이 큰 사업을 맡기십시오. 그분의 천사들과 성인들에게 기도하고, 특히 성모님의 든든한 보호를 청하십시오. 당신 사업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성공리에 그 일을 끝내실 것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신에게 맡겨진 조선대목구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사목 서간 내용이다. 그는 1832년 11월 23일 복사인 왕 요셉에게 이 편지를 동지사 행렬을 따라온 조선 신자들에게 전하라는 임무를 주며 북경으로 떠나 보냈다. 왕 요셉은 이 편지 외에도 북경에 머물고 있던 남경교구장 가예타니 피레스 페레이라(Cajetani Pires Pereira, 1763~1838) 주교와 여항덕 신부에게 보내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를 갖고 갔다.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1818년 마카오에서 사망한 후 신임교구장이 결정되지 않아 남경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이라 주교가 북경교구장 서리직을 겸하고 있었다. 페레이라 주교는 포르투갈 라자로회 출신으로 1804년 남경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후 1806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그는 흠천감과 산학관 관원으로 북경에서의 추방을 면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교구인 남경에는 끝내 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북경교구 주교좌 남당은 남경교구청과 주교좌성당 역할도 하게 됐다.

페레이라 주교는 교황청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장인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조선 선교지 문제에 관해 자신은 호의적이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선교지를 잘 돌보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조선 선교지가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되면서 그는 마음을 바꾼다. 그의 방해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끝내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고 만다.

남당은 북경에 지어진 첫 번째 성당으로 예수회원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신부가 1605년 건립했다. 소현세자와 친분이 있던 아담 샬 신부가 거주했던 곳으로 조선 신자들이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 주교를 만나러 가던 곳이었다. 정하상(바오로)과 이여진(요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조신철(가롤로)이 그들이다. 북당은 도광 7년인 1827년 조정에 몰수돼 헐렸다. 강희제가 하사한 땅에 지어진 성당이 134년 만에 파괴된 것이다. 북당의 성물 등 귀중품은 북경에서 약 80㎞ 떨어진 서만자 성당으로, 책은 정복사(正福寺)로 옮겨졌다.

왕 요셉은 마카오에서 북경까지 4700㎞가 넘는 길을 홀로 여행했다. 그는 혹독한 겨울임에도 변변치 못한 차림으로 돈도 없이 길을 나섰다. 중국 여관에서는 이불을 주지 않기에 여행할 때 담요가 필수품이다. 왕 요셉은 얼어 죽기를 각오하고 담요를 팔아가면서 여행 경비를 충당해 북경까지 갔다. 목숨을 내놓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명을 지킨 것이다.

왕 요셉은 1833년 2월 27일(음력 1832년 12월 28일) 북경에 도착했다. 마카오에서 떠난 지 97일 만이다. 그는 북경에 머물던 조선 신자들에게 브뤼기에르 주교의 첫 사목 서간을 전했다. 이때 왕 요셉이 만난 조선 신자 대표는 아마도 유진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유진길은 1833년 12월 5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 안에 사목 서간을 잘 받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왕 요셉은 페레이라 주교와 여 신부에게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를 전했다. 이후 그는 1833년 4월 10일 여 신부와 만주로 갔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준비하기 위해 가는 길을 답사할 목적이었다.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국경을 건널 때까지 임시로 머물 적합한 집을 요동에서 물색한 후 여 신부와 헤어져 다시 북경을 거쳐 주교가 이미 와 있던 자신의 소주(蘇州) 집으로 갔다. 1833년 6월 26일 브뤼기에르 주교와 왕 요셉은 마카오에서 헤어진 지 만 7개월 만에 극적인 상봉을 했다.

이에 앞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12월 17일 마카오를 떠나 1833년 3월 1일 복건교구청이 있던 복안(福安)에 도착했다. 그가 탔던 배에는 사천(四川)으로 가는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와 강서(江西)로 가는 프랑스 라자로회 라리브 신부, 강남(江南)으로 파견된 포르투갈 라자로회 엔리케 신부와 선교사 1명, 산서(山西)로 가는 포교성성 소속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원 알폰소 마리 디 도나토 신부가 같이 탔다. 도나토 신부는 나중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산서 지역에 체류할 당시 많은 도움을 줬고, 또 주교가 마가자에서 선종한 뒤에 연락원에게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사실을 알리는 부고 서한을 쓰게 된다.

복안으로 가는 75일간의 항해는 녹록지 않았다. 마카오에서 복안은 서양 범선으로 3일이면 도착할 거리였으나 태풍과 해적의 습격으로 항해가 지루하게 길어졌다. 탑승자들은 넉넉하게 준비한 한 달 치 식량이 바닥나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배에서 내릴 때 더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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