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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나의 기업] (32.끝) 서왕석 마태오 성심애드㈜ 대표이사

[나의 신앙 나의 기업] (32.끝) 서왕석 마태오 성심애드㈜ 대표이사

예수 ‘성심’ 굳게 믿으며 ‘성심’껏 회사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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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3 발행 [1430호]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던 장남의 삶을 어머니의 기도가 바꿔놓았다.

뜻밖의 사고는 고통 속에서 은총을 깨닫는 값진 체험이 됐다.

서왕석(마태오, 62) 성심애드(주) 대표이사의 삶과 신앙 이야기다.

 

동종업계 매출 1위의 바탕은 신앙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 있는 성심애드(주)는 시계 부품 유통 및 완제품 제조 판매 회사다. 1992년 성심라이프(주)라는 이름으로 출발해 1998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올해 만 25년이 되는 셈이다. 시계 부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했지만, 제빵기계, 커피 기계 등도 수입해 판매했다. 3~4곳의 협력업체와 거래를 트기 시작해 5년 만인 1997년에는 국내 동종업계 15개 업체 중에서 매출 1위를 기록했고, 거래업체는 180개 업체로 늘어나는 급성장을 이뤘다. 비결이 뭐였을까.
 

첫째, 모든 제품에 대해 10% 이상의 이익은 절대로 남기지 않는다. 단가 2000원에 물건을 들여오면 10%의 이윤을 붙여 2200원에 파는 식이다. 이 원칙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둘째, 학부에서 행정학, 대학원에서 무역학을 전공한 노하우와 현장 경험을 살려 영세한 협력업체들의 생산ㆍ관리ㆍ품질 분야에 솔직하고 아낌없이 자문해 줬다. 이는 협력업체들과 상생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이로 인해 동종업계 경쟁업체들의 질시와 반목의 대상이 되는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셋째, 물건을 구매하는 데는 정도를 지켰고 품질과 납기를 정확히 지킴으로써 신뢰와 믿음을 구축했다. 넷째, 직원의 잘못으로 손해가 나는 계약을 하더라도 계약은 반드시 지켰다. 다섯째, 직원의 월급과 상여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때에 지급했다.
 

이와 함께 무엇보다도 뿌리 깊은 신앙이 회사 운영의 밑거름이 됐다. ‘성심(聖心)’이라는 회사 이름 자체가 예수 성심을 굳게 믿고 의탁하는 가운데 성심의 열정으로 회사를 운영하겠다는 각오와 의지의 표현이라고 서 대표는 말한다.
 

충남 서산 성연면이 고향인 서 대표는 5대째 이어오는 구교우다. 5대조와 4대조에서 각각 순교자 한 분씩이 나왔을 만큼 독실한 집안 출신이다. 8남매 중 장남으로 위로 누나 둘, 아래로 다섯 동생을 두었다. 대학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했지만, 전공과는 무관한 드라이아이스 공장의 생산직 사원으로 직장 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동생이 다섯이나 있어서 전공에 맞는 직장을 구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다급했었지요.”
 

열심히 노력해 사무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행정에 대한 소양 부족을 느껴 주경야독의 정신으로 방통대를 다니며 행정학을 공부했다. 1983년 직장 동료인 아내(박재진 체칠리아, 57)와 결혼했다. 3년 만에 부친이 폐암 말기로 투병하면서 집안의 재산을 모두 병원비로 쏟아부어야 했다. 부친 선종 후 장남으로서 어머니와 동생들 부양해야 했다. 생활은 늘 어려웠다. 월급을 받으면 며칠 안 되어 다시 빚을 지고 외상으로 살아야 하는 삶이 계속됐다.
 

“1989년쯤으로 기억합니다. 고달프고 힘들어 방황할 때였습니다.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일이 잦았지요. 어느 날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왔는데, 그때까지 어머니가 주무시지 않고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고 계셨어요. 그 모습에 정신이 확 들었고,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요한 묵시록(3,15)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에 마음을 다잡은 서 대표는 아내와 함께 54일 기도를 바치며 길을 열어주시도록 간구했다. 가난을 극복하려면 회사를 설립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을 굳혔다. 마침 다니던 직장이 시계와 관련된 회사였고 무역과 수출업을 담당했었기에 이와 관련된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을 물색했다.

 

기도와 용서로 무수한 어려움 이겨내
 

1992년 마침내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을 ‘성심’으로 지었고 로고도 만들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뜻하는 삼각형에 두 동생을 양옆에 데리고 끝없이 전진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문제는 자금이었습니다.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근처에 있는 은행으로 지점장을 찾았지만 수차례 문전박대만 당했지요. 그러다가 신자인 직원 한 분을 만날 수 있었고, 그분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10만 달러를 대출받을 수 있었습니다.”
 

부품을 사러 홍콩으로 갔다. 미리 연락해 놓았지만 찾아가니 만날 수가 없었다. 세 번이나 헛걸음을 한 끝에 네 번째에 어렵사리 만나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끈기와 성실로 신용을 얻고 협력업체들과 신뢰를 쌓아 가다 보니 불과 5년 만에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곧 어려움이 닥쳤다. 외환위기의 파고가 덮치면서 30개사 이상의 협력업체가 부도가 났고, 성심애드도 큰 타격을 입었다.
 

“한 달 이상 실성한 사람처럼 지냈습니다. 몸무게가 7㎏이 빠졌고 한쪽 팔과 다리에 마비 증세가 왔지요. 하루는 출근해서 보니 아내와 당시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이었던 딸과 아들이 쓴 편지가 양복 주머니에 들어 있었습니다. ‘아빠, 우리가 있잖아요. 힘내세요. 돈은 또 벌면 되지요’(딸) ‘아빠가 그렇게 하고 다니시니 무서워요.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아들) ‘지금까지 어려웠어도 참고 살아왔잖아요’(아내). 편지를 읽고 그날로 약봉지를 다 버렸습니다. 훌훌 털고 일어났지요.”
 

다시 전진이 시작됐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시계 완제품의 제조 판매를 시작하면서, 중국에 공장 겸 지사를 설립했다. 연 100만 개의 완제품을 생산해 중국에 40개 매장을 두고 판매했고, 국내에는 20개 회사에 납품했다. 해외에도 7개국에 수출했다. 수출 상담을 위해 40개국 이상을 누비고 다녔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2002년 천호동본당 사목회 부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본당 신자가 상을 당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시골로 상가 방문을 한 후 올라오는 길에 일행이 탄 승합차가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8명 중 5명이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난 것이다. 서 대표는 중상을 입었고, 무려 14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 후유증으로 한쪽 팔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 못하는 장애인이 됐다.
 

“6개월 만에 직원의 부축을 받아 사무실에 와서 보니, 책상 옆에 늘 있던 큰 금고가 눈에 띄었습니다. 금고 안에는 쓰레기 뭉치가 된 어음들이 잔뜩 있었고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살려 두신 이유를. 그 어음의 주인들을 모두 용서하라는 것이었지요. 모두 불에 태워버리고 깨끗이 잊었습니다.”
 

사고로 몸이 불편해지면서 서 대표는 실무에서 차츰 손을 떼고 관리만 담당하면서 동생들에게 맡겼다. 2011년부터는 큰동생이 생활 제품과 판촉 부분을 맡아 별도 회사를 차려 운영하고 있고, 둘째 동생은 중국 지사를 전담하고 있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아직도 성심애드(주)는 시계 부품 유통 분야에서 동종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서 대표는 전한다. 중국 지사에서 생산하는 완제품 시계 판매와 수출도 계속 하고 있다.  

1995년 매리지 엔카운터(ME) 체험, 1996년 꾸르실료 체험, 2000년대 초반의 성령 세미나 체험은 사고 이후 관련 단체에서의 봉사 활동으로 이어졌다. 200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성내동본당 사목회장으로 8년 이상 봉사했고, 2012년에는 동서울 ME 대표 부부를 지냈다. 올해부터는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주간과 꾸르실료 한국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본당 사목회장을 마치면서는 홀몸 어르신들과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에 좀더 전념하려고 했는데, 올해 서울 꾸르실료 주간과 한국협의회 회장이란 중책을 새로 맡게 되어 애초에 계획한 봉사 활동은 2년 정도 더 연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글·사진=이창훈 기자 changhl@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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