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평양의 순교자들] (17) 장정온 악니다 수녀
내 나라, 내 민족 복음화 위해 수녀가 되겠습니다
2017. 08. 06발행 [1426호]
홈 > 기획특집 > 평양교구 설립 90주년 - 평양의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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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년 큰오빠 장면이 혼인한 직후 장정온 수녀 일가의 가족 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면 박사, 부인 김옥윤 여사, 부친 장기빈옹, 둘째 오빠 장발 전 서울대 미대 학장, 언니 장정혜, 어머니 황 루시아와 여동생 장정순, 조모 박 구네군다와 남동생 장극 서울대 공대 교수, 조부 장치응, 장정온 수녀. 사진 출처=「건국ㆍ외교ㆍ민주의 선구자 장면」

▲ 1921∼25년 미국 맨해튼대학에서 영문학과 함께 부전공으로 교육학을 공부하던 장면 박사와 함께한 장정온 수녀.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발, 장면, 김교임 수녀, 장정온 수녀.


메리놀 수녀회 장정온(악니다) 수녀는 시대를 앞서 간 수도자였다. 장면(요한 세례자) 제2공화국 국무총리의 동생으로 메리놀 수녀회 사상 최초의 동양인 입회자였고 한국 최초의 본토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초대 원장이었다. 1925년 평양지목구에 파견돼 25년 넘게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성소를 실천했고 6ㆍ25 전쟁 중 순교했다.



동양인 최초로 미국 메리놀 수녀회 입회

장정온 수녀는 1906년 11월 12일생이다. 출생지는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전동(현 인천광역시 중구 전동). 당시 인천 해관에서 세무 관료로 근무하던 장기빈(레오)과 황 루시아의 3남 4녀 중 넷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마리아였다. ‘어려서부터 모든 언행이 나무랄 데 없었고 순명과 정직하며 인내가 특히 뛰어났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그의 가족은 1915년 서울 정동으로 이사했다. 그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현 숙명여고) 보수과를 다녔고 1922년 3월 졸업했다. 그해 5월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추천으로 언니 장정혜(구네군다), 오빠인 장면 전 총리의 처조카 김교임(마르가리타)과 함께 미국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했다.

장 수녀가 수련소에 들어갈 때의 일화는 지금도 전해 온다.

“왜 수도 생활을 하려 하는가, 또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고, 내 나라, 내 민족을 돕고 싶다”면서 “어떤 일이든지 하고 싶다”고 답변했다. 장 수녀는 1922년 8월 미국 뉴저지 주 메리놀 수녀회 본원에서 ‘악니다’라는 수도명을 받고 착복식을 했다. 하지만 언니 장정혜는 도중에 수도생활을 포기한 뒤 귀국했고, 장 수녀는 1925년 4월 30일 김교임 수녀와 함께 첫 서원을 한 뒤 그해 10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평양지목구에서 선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첫 소임지 의주본당에서 어린이들과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메리놀회 수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통역을 담당했다.

한국인 선교 수녀회의 필요성을 절감한 제2대 평양지목구장 존 에드워드 모리스(한국이름 목이세) 몬시뇰은 1931년 초 영유본당 관할 구역에 있던 메리놀 수녀회 한국지부(지부장 제노베파 수녀)에 새로운 한국인 수녀회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메리놀 수녀회는 그해 7월 평양 관후리성당 근처 상수구리(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만수동) 257번지의 기와집 두 채를 구입, 수녀원으로 개조했다. 193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을 맞아 설립자 모리스 몬시뇰 주례로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수녀회를 설립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출발이다.



여러 기도문·영적 도서 번역해 수도자 교육

새로운 수녀회 교육 담당자로 선발된 장 수녀는 일본 도쿄 성심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문학을 전공한 뒤 1935년 9월 귀국해 지원자들의 지도 수녀를 맡았다. 1938년 2월 교황청에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설립 및 회헌 인준을 받게 되자 장 수녀는 그해 6월 초대 수련장을 맡았다. 당시 장 수녀는 말보다 실천적 모범으로 회원 양성에 열성을 다했고, 여러 기도문과 영적 도서를 번역해 수녀들의 기도 생활에 도움을 줬다. 특히 장 수녀가 초창기 수련자들을 가르칠 때 표어로 삼은 말씀은 ‘마음을 드높여’(Sursum Corda)였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드높여’ 하느님께 향하라”는 이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영적 기반이 되고 있다.



전쟁 중 혼란 속에서 수도회 활성 위해 노력


1941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메리놀 외방 선교회 회원들이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자 당시 평양대목구장 윌리암 오세아 주교는 한국인 수녀회 장래를 위해 같은 한국인인 장 수녀를 원장으로 임명했다. 태평양 전쟁 와중에 메리놀회 동료들을 떠나 보낸 장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회원 양성에 혼신을 다했다. 장 수녀는 특히 수녀들의 영신 생활과 전교 활동을 돕기 위해 회지 「마음을 드높여」(Sursum Corda)를 창간, 매달 2회 발간하면서 수녀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고, 각자의 사도직에 파견돼 있으면서도 수녀들의 마음을 모원으로 향하게 했다. 오랫동안 메리놀 회원들과 떨어져 지내던 장 수녀는 1946년이 돼서야 남한에 진출한 메리놀 회원들을 통해 미국 본원과 연락하면서 경제적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1949년 5월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를 비롯해 성직자들이 체포되면서 사태가 급박해졌다. 게다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본원으로 쓰고 있던 서포 본부 건물을 양도하라는 북한 당국의 강요로 공동생활이 힘들게 됐다. 장 수녀는 1950년 5월 14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임시 해산했다. 그때까지 본당 신부가 체포되지 않은 분원의 수녀들은 분원으로, 본당 신부가 체포된 분원의 수녀들은 자신의 본가로 귀가하도록 한 뒤 강성효(베드로) 수녀에게 뒷수습을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그해 6월 미국 본원으로 올 것을 준비하라는 메리놀 수녀회 총장 골룸바 수녀의 편지를 받고 월남할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수녀원 해산 직후 병원에 입원해 디스크 수술을 받은 장 수녀는 진남포본당에 갔지만, 그해 6월 25일 진남포본당 주임 조문국 신부가 체포되고 전쟁이 일어났다. 장 수녀는 강성효 수녀, 변대옥(헬레나) 수녀와 함께 서포에서 멀지 않은 용궁리 회장 집에 머물다가 영유본당 관할 송림리공소 회장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4일 오후 7시 장 수녀는 인민군 장교 2명과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다. 디스크 수술로 걷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달구지에 실려 끌려간 장 수녀는 건강이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빠인 장면 박사가 유엔에서 북한의 종교 박해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기에 오래 생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장 수녀의 시신을 서포 우물에 밀어 넣는 것을 보고 밤에 시신을 꺼내 근처에 매장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자료=평양교구 사무국 제공











장정온 수녀는


■ 1906년 11월 12일 경기도 인천부 부내면

전동 태생



■ 1922년 3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현 숙명여고)

보수과 졸업



■ 1922년 5월 메리놀 수녀회 입회





■ 1925년 4월 30일 첫 서원





■ 1938년 6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초대

수련장



■ 1941년 12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원장

■ 1950년 5월 14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임시 해산

■ 1950년 10월 4일 인민군과 보위부원들에게 체포

피랍돼 행방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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