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영성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3) 8세기 ② - 성화상 논쟁과 종교 예술의 활성화
일단락된 성화상 논쟁… 불씨는 꺼지지 않아
2017. 07. 16발행 [14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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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이슬람 제국의 침입을 막아낸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종교 분야에도 깊이 관여함으로써 동방 교회 자체를 분열시켰을 뿐만 아니라, 서방 교회와도 대립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이 서방 교회를 이방 민족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않자, 서방 교회는 유럽 본토 정치 세력과 우호 관계를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중심에 ‘성화상 논쟁’이라는 사건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 성상 논쟁 시기 동로마 제국에서 제작된 성경 시편 사본의 삽화. 성상파괴주의자들이 교회에서 물에 적신 해면으로 예수의 성상을 지우는 것을,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장대에 꽂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 예수에게 갖다 댄 것에 대비시키고 있다. 출처=나무위키



성화상 파괴론자들의 출현

시리아 지역 평민 출신이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Leo III, 재위 717~741)가 황제 즉위 전후로 이슬람 제국의 유럽 진출을 저지시키면서 인기가 높아지자, 황제는 본격적으로 종교 문제에도 관여했습니다. 725년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소아시아 주교들이 황제에게 성화상 파괴를 간언했고, 726년경에 레오 3세는 성화상 공경 금지 칙령을 내리면서 황궁의 칼케(Chalke) 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을 제거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게르마누스 1세(Germanus I Constantinopolitanus, 재임 715~730)는 성화상 파괴를 반대하다가 730년 레오 3세에 의해 해임되었습니다. 레오 3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PP. II, 재임 715~731)에게 황제의 정책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고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며 황제에게 성화상 공경에 대한 서한을 보냈습니다.(「신경 편람」 581 참조) 그러자 레오 3세는 또 다시 성화상 공경 금지 칙서를 발표하고 성화상 철거 및 성인 유해까지 파괴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Gregorius PP. III, 재임 731~741)도 731년 로마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성화상 파괴론자(iconoclast)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레오 3세의 아들이자 후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us V, 재위 741~775)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반란에 의해 퇴위되어 잠시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이때 그를 보호하며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성화상 파괴론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743년 콘스탄티누스 5세는 제위를 회복하자 바로 성화상 파괴 명령을 내렸습니다. 754년 콘스탄티누스 5세는 히에레이아(Hiereia) 교회 회의를 소집해 성화상 공경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성화상 공경을 실천하는 수도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 성모자상을 들고 있는 다마스쿠스의 요한.



성화상 공경의 당위성을 밝힌 다마스쿠스의 요한


다마스쿠스의 요한(Ioannes Damascenus, 650경~754이전)은 성화상 파괴론자들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이 태어날 당시에 다마스쿠스는 이미 이슬람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다행히 한동안 그리스도교 관용 정책을 펼쳤던 이슬람 지도자들로 인해 요한은 가업을 물려받아 황실에서 관직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7세기 말부터 정책이 바뀌었고, 요한은 관직을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마르 사바 수도원으로 이주하여 수도 생활을 실천하면서 성경과 신학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게 된 예루살렘 총대주교 요한 5세(Ioannes V Hierosolymitanus, 재임 706~735)는 요한에게 사제품을 주었으며, 성화상 논쟁에 가담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성화상 공경의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했고, 사망 후인 754년에 히에레이아 교회 회의에서 단죄되었다가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복권되었습니다.

요한은 많은 양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3부작으로 구성된 「인식의 원천(Fons Cognitionis)」 중 한 권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De Fide Ortodoxa)」에서 다양한 주제로 구성된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성화상 공경과 성인 및 마리아 공경에 대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또한 요한은 저서 「성화에 관한 세 편의 연설(Orationes de Imaginibus Tres)」에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올바른 근거를 밝혔습니다.

첫 번째 연설에서 요한은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창조된 하느님의 형상이기에 성자 그리스도는 당연히 성부의 형상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두 번째 연설에서 요한은 예형론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의 구원을 보장할 구원의 은총이 담겼다고 언급했습니다. 세 번째 연설에서 요한은 하느님에 관한 형상의 묘사가 강생의 신비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에서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화상에 관한 교의적 정의 공포됨

비잔틴 제국 황제 레오 4세(Leo IV, 재위 775~780)가 즉위하자 성화상 공경을 지지하는 황후 이레네(Irene, 750쯤~803) 덕분에 암묵적으로 성화상 공경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us VI, 재위 780~797)는 모후 이레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게 되어 786년경에 성화상 공경 신심이 거의 회복되었습니다.

따라서 여황제 이레네에 의해 787년에 소집된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에 관한 교의적 정의를 공포했으며(「신경 편람」 600~603 참조), 성화상들,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신경 편람」 605~609 참조) 또 성화상 공경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파문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성화상 논쟁이 한 번 더 벌어졌습니다. 비잔틴 제국 황제 레오 5세(Leo V, 재위 813~820)는 815년 성화상 공경 금지 칙령을 발표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케포루스 1세(Nicephorus I Constantinopolitanus, 재임 806~815)의 협조를 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총대주교를 해임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 황제 미카엘 3세(Michael III, 재위 842~867)가 즉위하자 모후 테오도라(Theodora, 재위 842~855)는 섭정으로 8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성화상 공경 법령을 확인했으며, 성화상 공경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메토디우스(Methodius Constantinopolitanus, 재임 843~847)를 총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비록 성화상 파괴론자들이 어떤 우상이나 신상 및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명(탈출 20,4; 레위 26,1; 신명 4,16~18 참조)을 핑계 삼아 성화상 논쟁을 벌였으나, 성화상 공경은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 때문에라도 평신도 신심 운동 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성화상 공경에 힘입어 교리 내용을 담은 예술 작품이 교회 안팎에 설치되었으며, 성화상 공경을 지지했던 교황은 세속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신앙을 지키는 수호자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성화상 공경을 지속적으로 지지했던 서방 교회와 성화상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동방 교회는 훗날 분열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톨릭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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