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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우 주교] 포콜라레 영성 충만하며 사회적 비전·희망 품은 목자
제주교구 부교구장 문창우 주교 삶과 신앙
2017. 07. 09발행 [14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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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우 주교 부모인 문종수 옹과 김양희 여사가 기도방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이정훈 기자

▲ 어린 시절 문창우(오른쪽 두 번째) 주교가 남매, 친척들과 함께한 모습.

▲ 제주 동초등학교 졸업 당시 문창우 주교 모습.


▲ 1996년 사제 수품 후 첫 미사에서 강복하는 문창우(왼쪽) 주교.

▲ 문창우 주교 가족 사진. 문창우 주교 제공



문창우 주교의 제주교구 부교구장 임명 발표 다음 날인 6월 29일. 뒤늦게 아들의 주교 임명 소식을 접한 문 주교의 부친 문종수(요셉, 86, 제주 동광본당)옹과 모친 김양희(아가타, 84) 여사는 이날도 어김없이 집 한편에 마련된 기도방에서 새벽 기도를 바쳤다. 문 옹은 “주교직의 무거운 직무를 수행하는 게 염려되기도 하지만, 교구민들을 평안히 이끌어주는 주교님이 되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여사도 “아들이 주교님 되셨다고 아들만 위해서 기도하면 되겠느냐”며 “오늘도 우리 교구 사제단 전체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했다.



아들이 전한 신앙

문 주교는 고2 때 세례를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됐다. 어릴 때 복사를 서거나 소신학교를 다닌 건 아니지만, 청년 시절 주일학교 교리교사를 열심히 하며 신심을 깊이 다졌다.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문 주교는 어린 시절 줄곧 ‘착한 아이’로 칭찬받으며 자랐다. 뚜렷한 이목구비로 또래 중에선 늘 눈에 띄었다. ‘착한 창우 오빠’는 여동생들이 옷가지를 두고 싸우면 어김없이 다툼을 중재했다. 주변을 돌아볼 줄 알았던 유년시절 창우는 길에서 자신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 아이를 만나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줄 정도였다. 오랫동안 관광버스 운전기사 일을 하던 아버지가 집을 며칠씩 비우는 날이면 동생들을 돌보는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기도 했다.

1981년 제주대 농화학과 1학년 시절 문 주교는 마리아 영성 운동인 ‘포콜라레’를 접하게 된다. 1987년 6월 항쟁의 중심에서 학생들과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칠 때까지 청년 문창우는 포콜라레 모임을 이어가며 ‘학업’과 ‘성소’를 놓고 고심했다. 그리고 1988년 학교 졸업 후 문 주교는 포콜라레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로피아노행을 결정하고 무작정 1년 6개월간의 ‘영성 유학’을 떠났다. 하느님 부르심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온몸으로 느낀 문 주교는 사제 성소를 확신하고 돌아와 신학교에 편입했다. 사제가 될 운명이었는지 문 주교는 시험 당일 신기하게도 전날 읽고 외운 복음과 교리상식 문제가 그대로 출제돼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

문 주교의 부모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 저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장학금을 받고 다니며 착실했던 아들의 선택을 늘 믿고 맡겨 왔기에 기꺼이 “그리하라”고 응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신자였던 문 주교의 부모는 이후 “아들이 내일모레 사제가 되는데 세례 안 받으시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그 길로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해 하느님 자녀가 됐다. 이후 가족과 친척 모두가 천주교 신자가 됐는데, 문 주교가 가족 전체를 성가정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 셈이다. 문 주교와 열네 살 터울인 막냇동생 문창건(동문본당 보좌) 신부도 큰형을 따라 2015년 사제품을 받았다.



아버지 같은 교장 신부님

2016년 초 문 주교는 신성여자중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등굣길 교문에서 학생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학교의 위상과 비전, 학생들의 학업 증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 마음속 자긍심과 사랑이 우선”이라고 여긴 문 주교의 지론 때문이었다. 교장실도 개방했다. 이후 교장실은 학생들이 어느 때고 와서 재잘거리는 쉼터가 됐다. 교장실에서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길 좋아했던 학생들은 수업시간 종이 울려도 아버지같은 교장 신부와 얘기하고 싶어 했다. 학생들이 스스럼없이 문 주교에게 먹던 아이스크림을 맡기고 가고, 문 주교는 찾아온 학생에게 달걀을 직접 까주는 교장이었다. 광주가톨릭대 교수 시절부터 신학생들을 태우고 다니던 ‘달달거리는’ 봉고차를 학교장이 된 지금도 끌고 다닌다. 문 주교는 올해 말까지 교장직을 이어갈 예정이다. 학생들은 이제 ‘교장 신부’가 아닌, ‘교장 주교’와 더 많은 이야기꽃을 피워나갈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 사랑에 감격하는 울보 주교(?)

문 주교는 신학생 시절부터 “‘하느님 섭리’를 느낄 때마다 그렇게 눈물이 난다”고 했다. 부제서품식에서 바닥에 엎드리는 부복(俯伏) 예절 때에도 그는 통곡하다시피 울었다. 자신이 사제품 받을 때와, 후배들이 사제가 될 때에도 그는 동료 사제들이 “형은 대형 수건이 있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동료 사제와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받을 때에도 방에서 기도 중엔 어김없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하느님 사랑을 느낄 때마다 눈물을 보인 문 주교는 주교 임명 순간에도 선배 사제들 품에서 눈물을 훔치고 참느라 애를 썼다.

대학 시절 학생 시위에 참가하며 사회문제에 적극 나섰던 문 주교는 사제가 된 후에도 1948년 일어난 제주 4ㆍ3사건과 같은 역사 문제를 각종 심포지엄에서 신학적으로 고찰해 내는 등 신앙적 식견을 사회문제와 결부시켜 왔다.

문 주교는 “전임 교구장 김창렬 주교님의 영성과, 사회문제에 적극 나서며 사회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신 강우일 주교님의 시각을 함께 본받아 부교구장 직무를 수행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성모 마리아 안에 일치하는 제주

‘제주 토박이’로, 제주교구 설정 46년 만에 교구 출신 첫 주교가 된 문 주교 영성의 중심에는 ‘포콜라레’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사제 포콜라리노’로서 지금도 매주 섬과 육지를 오가며 포콜라레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문 주교는 “포콜라레에서 익혀온 ‘마리아 영성’으로 제주 4ㆍ3사건, 강정마을 문제 등 제주 사회가 지닌 문제를 평화적으로 바라보는 주교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제 사제 수품 성구가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입니다. 주교수품 성구 또한 이것으로 하려고 합니다. 제 성구 말씀대로 교회와 가정, 우리 주변과 세상에 여전한 분열과 아픔, 갈등과 시련들을 성모 마리아에서 비롯되는 사랑을 통해 하나로 이끌고 싶습니다. 제주 사회가 하느님의 손길을 함께 공감하고 일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신자 여러분의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문창우 주교 약력

1963. 제주 출생

1988. 2. 제주대학교 농화학과 졸업

1996. 2. 광주가톨릭대 졸업

1996. 사제 수품

1996~1997 서문본당 보좌

1997~1998 중앙본당 보좌

1998~1999 중문본당 주임

2006~2016 광주가톨릭대 교수

2007. 제주대 사회학 석사

2014. 서강대 종교학 박사 수료

2016. 3~현재 제주 신성여자중학교 교장

2017. 6. 28 제주교구 부교구장 주교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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