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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순교자들] ⑩ 조문국 바오로 신부

[평양의 순교자들] ⑩ 조문국 바오로 신부

‘살고 싶다’는 욕망 뿌리치고 기꺼이 순교의 길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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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1 발행 [1418호]

▲ 기림리본당 5대 주임인 조문국 신부와 장정온(악니다, 왼쪽), 강오숙(루갈다, 오른쪽) 수녀가 본당 주일학교 학생들과 첫 영성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문국(바오로) 신부는 삶으로나 사목적으로나 ‘모범 사제’였다. 신학생 시절이나 사제로 살 때나 한결같이 성덕과 신앙에서 항구심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판단력이 분명하고 지구력이 강하며 배포가 컸다”는 주위의 평가도 받았다.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가 “교구 사제 중 하나는 살아남아 교회 박해의 실상을 증언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조 신부에게 피란을 권유했음에도 그는 월남을 준비하다가 포기하고 순교의 길을 걸었고, ‘박해받는 관서교회의 씨앗’이 됐다.

 

일제 강점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조문국 신부는 1921년 5월 평안남도 평양시 관후리(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봉윤(요셉), 어머니는 곽인숙(아가타)이였고, 3남매 중 장남이었다.
 

일제 강점하 그의 집안은 독립운동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독립운동가 조만식(1883∼1950) 선생이 이웃에 살았고, 외숙 곽연성(요셉, 1893~1934?) 또한 3ㆍ1 운동 때 궐기했다가 일경에 쫓겨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과 선양, 하얼빈, 지린 등지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곽연성은 1923년 1월 3일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 천주교청년단 대표로 참여했고,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자 안창호 주도로 만주에 세워지는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조 신부의 부친은 외삼촌과 함께 중국과 만주에서 함께하다가 생을 마쳤고,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만다. 그래서 어머니는 삯바느질하며 조 신부를 포함해 3남매를 키워야 했다.
 

이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웠는데도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도 곧잘 했고 신체도 건장했다. 그랬기에 본당 신부의 총애를 받아 성모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진학한다. “갔다가 중도에 그만둘 것이면 아예 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어머니의 말에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생 시절 그와 관련된 일화가 몇 가지 남아 있다. 소신학교 동기인 허창덕(서울대교구, 1992년 선종) 신부 증언에 따르면, 조문국 신학생은 모든 일에 성실성과 책임감을 보여주며 다른 신학생의 모범이 됐다고 한다. 부제가 된 뒤로는 “동기일지라도 이제는 서로 높임말을 쓰자”고 제안한 뒤 그대로 실천했다. 같은 교구 출신 후배인 석원섭(마르코) 신학생이 학업에 어려움을 겪자 방까지 옮겨 지도하며 학습을 도왔다. 하지만 같은 교구,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박 토마스 부제가 폐 질환으로 선종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런 아픔 속에서 조 부제는 홀로 1945년 12월 27일 평양 상수구리(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만수동) 임시 주교좌성당에서 홍용호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는다. 수품과 동시에 그는 관후리본당 보좌로 임명됐고, 주교 비서 겸 교구 경리 담당도 맡아야 했다. 조 신부는 특히 일본 강점기에 징발당한 관후리 주교좌 성당 부지를 돌려받고 평양 양촌 주교관 건물을 당국과 교환하는 협상을 하고자 평양시청과 소령군사령부를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러시아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그는 한 달 보름 만에 독학으로 러시아어를 배워 소련 군정 당국과 협상을 원만하게 이끌었다.


 

본당 공동체 신심 강화·신학생 양성에 힘 쏟아
 

1946년 9월 평양 기림리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조 신부는 주교 비서 겸 경리 담당도 겸직하면서 신심단체 활성화에 주력했다. 성당 건물도 너무 초라했고 조 신부 또한 본당 사목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신심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활동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조 신부는 1948년 9월 진남포본당으로 발령을 받는다. 신자 수만 3000여 명에 이르는 큰 본당이었고, 오늘날 사목회와 같은 형태의 명도회라는 단체가 잘 운영되는 본당이었다. 그런 본당에 28세의 젊은 신부가 부임하자 명도회 회장단은 조 신부가 본당을 어떻게 감당할지 염려했다. 조 신부는 본당에 부임한 이후 본당 공동체의 신심 강화와 함께 교리 지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특히 주일학교 학생들과 복사들, 신학생 양성에 주력했다. 동시에 성당 고용인들도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보살펴 공동체의 신망을 얻었다. 그의 성덕에 매료돼 신학교에 들어가는 이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그렇지만 교회 상황은 날로 심각해졌다. 1949년 5월 14일 홍 주교가 체포되자 조 신부는 날마다 대재(금식재)를 지키며 홍 주교의 수난에 동참하는 한편 자신도 체포당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이 다가왔다. 대축일 전날인 6월 3일, 정치보위부원들이 찾아와 보안서에 동행할 것을 요구하자 신자들은 대축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서너 시간 동안 고해성사를 보며 조 신부를 보호했다. 신자들의 이 같은 지연작전에 밤늦게 보안서로 연행됐던 조 신부는 뜻밖에도 보안서장의 사과를 받으며 성당으로 돌아왔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자 진남포본당 신자들은 긴급 연락망을 만들어 어떤 사태에도 5분 이내에 200∼300명의 신자가 모일 수 있도록 했다.
 

 

순교 각오하고 신학생들만 월남시켜
 

1949년 12월 24일, 목자를 잃은 평양의 신자들이 진남포본당으로 몰려오자 조 신부는 본당 신자들의 협조를 받아 판공성사까지 보도록 배려한 뒤 성탄 자정 미사를 집전했다.
 

예수 성탄 대축일을 보낸 조 신부는 진남포본당 출신인 윤공희 차부제(훗날 광주대교구장 대주교)를 불러놓고 홍 주교가 납치되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을 전했다.
 

“언젠가는 평양대목구 사제 전원이 희생될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해 평양대목구 사제 중 누구든 한 사람은 남한으로 내려가 먼 장래 평양대목구의 재건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조 신부는 월남할 준비를 하다가 “이게 혹시 살고 싶다는 인간적 유혹이 아닌가” 싶어 월남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본당에 남겠다고 윤 차부제에게 전했다고 한다. 조 신부는 진남포성당에 계속 남아 성무를 집행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보위부에 소환됐다가 풀려난 조 신부는 1950년 4월 성당과 사제관을 군에 징발당한 뒤 성당 양로원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양로원마저 빼앗기자 남포시 용정리(현 남포특별시 와우도구역 용정동) 80번지에 있던 본당 교우 나 요셉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계속 사목했다. 그리고 평양대목구의 미래를 내다보며 양덕배 신학생(훗날 부산교구 사제)과 윤 차부제 등 신학생들을 월남시켰다.
 

그 뒤 1950년 6월 25일 새벽 1시, 전쟁이 발발하기 3시간 전, 조 신부는 나 요셉의 집에서 미처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잠자리에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조 신부가 어디로 끌려가 갇혀 있었는지, 그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간 조 신부는 국군의 10ㆍ20 평양 수복 이전에 처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자료 제공=평양교구 사무국



조문국 신부는

■  1921년 5월

평양시 관후리 출생

 

■  1933년

평양 성모보통학교 졸업

 

■ 1938년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졸업

 

■  1945년

덕원신학교(대신학교) 졸업

 

■ 1945년 12월 27일

양 상수구리 임시 주교좌성당

(구 산정현예배당)에서 사제 수품

 

 ■  소임  

평양 관후리 주교좌본당 보좌 겸 교구장 비서 겸 경리 담당, 기림리본당 주임, 진남포(현 남포)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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