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영성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9) 가난
“하느님의 종은 아무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2017. 03. 19발행 [14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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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은 아무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 아시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유물실에 보관돼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수도복.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 이상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아시시의 가난뱅이’였다. 가난은 곧 그의 이름이었으며 그의 삶과 영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표징이었다. 바오로 사도가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듯이,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면서 바로 가난의 삶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그 가난은 ‘인간의 가난’인 동시에 ‘신적(神的) 가난’이며, 인간은 성자의 가난 안에서 사랑의 하느님과 일치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특별한 ‘가난뱅이’ 프란치스코

사실 가난이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는 수많은 반교회 이단 청빈운동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그들은 작은 형제들 이상으로 가난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프란치스코를 특별히 ‘가난뱅이’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가난이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같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가난을 수덕적 행위로 받아들였다. 가난은 본능을 거스르는 고행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욕망에서 이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복음 속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으로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고 가치였다. 그는 복음에서 드러난 주님의 온 생애를 조망하면서 그분의 비하와 겸손을 드러내는 가난을 직관하고, 그 가난을 형제들이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기를 권고한다.

“형제들은 집이나 장소나 어떤 물건, 그 어느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돌처럼 당신 얼굴빛 변치 않으셨고’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뿐만 아니라 복되신 동정녀도, 제자들도 가난하셨고 나그네 되셨으며 동냥으로 사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자께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셨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 프란치스코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가난이다. 바로 이 가난에서부터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직관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한 그의 구체적인 계획이 출발한다. 그는 유언에서 회개 초기의 공동체 생활을 회상하며, 그들이 지켰던 가난의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우리 생활을 받아들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또한 안팎으로 기운 수도복 한 벌과 띠와 속옷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이상 더 가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

프란치스코가 귀도 주교와 아시시 시민들 앞에서 세속을 떠날 것을 선언하며 한 첫 번째 행동은 바로 옷을 모두 벗어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한테서 받은 의복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난에 옷 벗김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받아들이는 표지였다.

그리고 뒤이어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 카타니의 베드로, 에지디오, 실베스테르 같은 형제들이 그를 찾아와 함께 지내기를 청했을 때, 그들에게 첫 번째로 요청한 것은 바로 재물의 포기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가난하게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그들도 가난하게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를 형제회로 받아들이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절차로서, 법적으로 굳어진다. 형제회에 입회하기를 원하는 이들은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유로운 의지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믿음과 결심을 형제회와 자기 자신에게 증명해 보여야 했다.



인간은 왜 시험에 드나?

때때로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를 기만한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결심과 확고한 듯한 믿음도 약간의 시험에 여지없이 무너지곤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믿음을 끊임없이 시험하신다. 그분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믿음의 실체를 알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물론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복음적 가난’은 이러한 물질적인 재물의 포기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영적인 재산을 포함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이탈을 의미한다. 그가 추구하는 가난은 세상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에 대한 열렬한 사랑 때문에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종은 죄 외에 어떤 일도 못마땅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하면 그 죄를(판단할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로마 2,5 참조) 어떤 일 때문에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은 진정코 아무 소유도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마태 22,21)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결합하는 길이었으며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에 인간이 근본적인 사랑으로 응답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가난은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이 첫 번째로 지켜 나아가야 할 삶의 양식이 되었으며, 작은 형제로 살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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