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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

<8> 다시 레지오 단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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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1 발행 [1393호]
<8> 다시 레지오 단원으로

▲ 한 교우의 장지 운구 장면.



40대 한창 일할 나이에 목포를 떠나 인생 황혼기인 60대에 다시 목포로 돌아온 김금룡은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한 채 일만 하던 자신의 상한 몸을 서서히 치유해 나갔다. 아내 박기남은 오랫동안 바깥에서 홀아비 아닌 홀아비로 혼자 살다가 돌아온 늙은 남편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늘 조용히 행동하였다.



눈부신 발전 이룬 목포 교회

김금룡이 목포를 떠나 압해도에 가 있던 17년 동안 목포 교회는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그가 압해도로 떠날 때는 산정동본당과 경동본당 두 곳뿐이었으나, 목포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북교동ㆍ연동ㆍ대성동본당 등이 신설되어 다섯 군데나 되었다. 본당이 늘어났어도 본당마다 신자들은 여전히 많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1953년에 김금룡을 중심으로 세 개 쁘레시디움으로 시작된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2015년 8월 말 현재 광주, 서울, 대구 세 곳에 세나뚜스가 있고 행동단원 25만 1040명, 협조단원 27만 9280명 등 총 53만 1320명의 단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의 약 10%에 해당할 만큼 한국 교회의 중추적인 신심 단체로 성장한 것이다.

김금룡이 용당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지역은 연동본당 관할이었다. 그는 1979년 용당동본당이 설립될 때까지 연동본당 소속 레지오 단원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아직 몸이 온전치 못했지만 천성적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는 새벽에 아내와 함께 아침기도를 바치고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나면 압해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가 해가 져야만 돌아왔다. 집을 나서면 우선 성당에 들러 미사를 드리고, 미사 봉헌이 없을 때는 오랫동안 성체조배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압해도 공소 회장일 때와 다름없이 성당 주변에 사는 주민들부터 인사하면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고 아픈 이는 없는지 살피며 돌아다녔다.

김금룡이 목포로 돌아온 지 5년이 지난 1979년 10월 30일에 연동본당에서 용당동본당이 분가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부터 산업화가 본격화하여 도시 인구가 급증하였다. 이러한 사회 현상 때문에 도시로 이주하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아졌다. 기존 본당들은 갑자기 늘어난 신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본당을 부득이 분할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분당된 신설 본당들에서는 교회 묘지 확보, 다른 지역에서 새로 유입되어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의 장례 같은 문제들이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일정한 시기까지는 묘지가 있는 인근 본당들의 도움을 받거나 예전에 살던 본당 신세를 지기도 하고, 선산이나 공설 또는 사설 묘지로 가고, 이도 저도 안 될 때는 화장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응급 처방도 한계를 드러냈다. 또한 선종하는 이들이 갑자기 많아지다 보니 본당의 기존 조직으로는 장례를 원활하게 거행하기 어려워졌다.

▲ 산정동본당의 옛 성전 모습.




연령회장으로 밤낮 없이 봉사

도시 본당들은 기존 연령회의 조직을 확장하고 활성화하거나, 없던 곳은 새로 조직하여 교우들이 선종했을 때 수행해야 할 갖가지 업무들을 맡기기 시작했다. 임종 전부터 하관 이후까지 바쳐야 할 기도, 예식 준비와 참여 같은 신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연령회가 앞장서서 감당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교우가 선종하면 염습은 물론이고 경황이 없는 유족을 대신하여 온갖 뒤치다꺼리까지 기꺼이 맡았다. 이러다 보니 장례 기간에 필요한 다양한 업무를 오늘날의 상조회사보다 훨씬 더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전문 조직으로 변모했다.

김금룡은 압해도 공소 회장에 임명되어 목포를 떠나기 전에 이미 레지오 마리애 활동으로 환자 방문과 상가 봉사를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개하였다. 압해도에서 공소 회장을 역임할 때는 환자 방문과 상가 봉사의 모든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특히 염습에 감동할 만한 정성과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러한 그의 활약상은 이미 목포의 교우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와 함께 연령회 활동은 당연히 그의 주요 일과가 된 것이다. 김금룡이 연령회장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용당동본당은 교우들이 5000명 이상으로 광주대교구에서 아홉 번째로 큰 본당이 되어 있었다.

김금룡은 이렇게 큰 본당의 신자들뿐 아니라 목포의 가난한 비신자들의 장례도 결코 외면하지 않았으므로 김금룡과 함께 활동하던 용당동본당 연령회원들은 다른 본당 연령회원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김금룡은 죽어 가는 환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이 병원이건 자택이건 간병에서 장례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이 세상을 하직하려는 사람들이 비록 냉담자거나 비신자이더라도 열심히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이런 그의 집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를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처럼 성의 있고 깔끔하게 염습하고 입관하는 사람이 당대의 목포에는 없었기 때문에 상가 유족들은 으레 그를 부르고 환영했다.

김금룡과 함께 활동하며 김금룡을 친아버지 이상을 따랐던 안형균(시몬)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집안에 급한 일이 있거나 개인적인 일이 밀려 있을 때 그런 전화를 받으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하기도 하는데, 가이오 단장님은 단 한 번도 이런 부탁을 물리친 적이 없으셨습니다.”

수의도 마련할 수 없고 관도 살 수 없는 지극히 가난한 가정에는 김금룡이 앞장서서 호주머니를 털어 부족한 장례 비용을 보조하기도 했다. 배우자나 자식은커녕 일가친척도 전혀 없이 혼자 쓸쓸히 죽어간 사람의 경우는 더욱 사정이 딱했다.

“단장님 같은 분들은 이제나저제나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떤 상가든 비록 적은 돈일지라도 반드시 부의(賻儀)를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리 작은 본당이라도 일 년이면 열 분 이상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정성을 다 기울인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후배들이 아무리 구두쇠라도 그런 단장님을 따라 실천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말보다 행동으로 후배들을 가르치는 신앙의 선배들이 많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아쉽기만 합니다.”(안현균)

김금룡의 이런 태도는 “교우가 죽으면 각 곳에 있는 교우들이 다 인애하는 덕을 채우고, 또 성교회의 실(實)됨을 널리 펴기로 마땅히 많이 모일 것이요, 각각 형세(形勢)대로 상가에 긴히 쓸 것을 가지고 와 부조(扶助)함이 좋으니라”(「텬쥬셩교례규」, 상장규구)는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참된 신앙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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