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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1) 사제 수품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1) 사제 수품

드디어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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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9 발행 [1384호]
드디어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 탄생

▲ 최양업 부제는 우여곡절 끝에 1849년 상해 장가루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진은 평화방송TV가 2008년 제작한 특별 기획 드라마 ‘탁덕 최양업’에서 최양업 부제(왼쪽)가 사제품을 받는 장면. 평화신문 자료 사진



다시 상해로 돌아와

최양업 부제는 한 달간 고군산도 신치도에서의 표류 생활을 마치고 영국 함선을 타고 프랑스 해군과 함께 상해에 도착했다. 메스트르 신부가 요동으로 가기보다 조선의 소식을 듣고 조선에서 오는 지시를 따르기에 제일 적절한 장소라고 판단해 상해에 머물기로 했다. 최양업은 당시 상해 생활을 ‘귀양살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천상의 도움을 애원하는 데 너무나 소홀했고, 인간적인 희망에 너무 의존했으며 또한 무수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우리에게 오는 하느님 자비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듯합니다”(1849년 5월 12일 자 상해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은 좌절했다. 기다리던 신자 배만 탔으면 곧바로 조국의 내륙으로 들어가 조선 선교사들과 그리운 가족들,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손에 잡힐 듯한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던 페레올 주교도 프랑스 함대가 고군산도에 좌초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가 함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배를 마련해 최양업의 이종사촌 형을 고군산도로 보냈으나 만날 수 없었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1847년 11월 25일 자로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페레올 주교는 이 편지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 사실과 함께 자신과 다블뤼 신부가 병에 걸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리고 “최양업 부제 외에 두 명의 선교사(아마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베르뇌ㆍ메스트르 신부일 듯)가 꼭 필요하다”고 밝혔다.

최양업은 상해 서가회성당 예수회 신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매사에 최양업을 우선으로 고려했다.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허락 없이는 최양업에게 사제품을 줄 수 없었기에 그는 노심초사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 부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양업의 사제품을 건의하는 게 적절한지 고민했다.

“그(최양업)는 상부로부터 오는 허락 없이는 서품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청하는 것이 적절할까요? 모르겠습니다. 페레올 주교가 이 젊은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신부님도 저와 같이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7년 11월 16일 자로 상해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에 큰 희망이 될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덕행과 재능으로 봤을 때 최양업이 조선에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리브와 신부가 1843년 6월 마카오에서 데쥬네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페레올 주교도 소팔가자에서 최양업을 지켜보면서 “대단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만일 한 살만 더 많았다면 올해 사제품을 받는 게 옳을 것”이라고 칭찬했다(페레올 주교 1843년 2월 20일 자 편지 참조). 그런데 페레올 주교는 그의 조선 입국 동반자로 김대건 부제를 선발했고,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성당에서 김대건 부제의 사제서품식을 주례했다.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 부제 사이가 왜 틀어졌을까? 아니, ‘무엇 때문에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까?’ 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함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던 메스트르 신부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이 의문에 관한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의 원정을 매우 염려합니다. 왜냐하면, 신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토마스에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이것은 주교와 얼마 동안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겪은 많은 모순이 그의 성격을 매우 까다롭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진정될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소팔가자에서 1845년 5월 25일 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 장가루성당에서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사진은 오늘날 상해 장가루 성당 전경. 리길재 기자


▲ 사제품을 받기 전 최양업은 서가회성당 예수회 신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일부 학자들은 서가회성당이 최양업 신부 사제서품 장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우여곡절 끝에 장가루성당에서 서품식


우여곡절 끝에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부활 제2주일에 상해 장가루(長家樓)성당에서 강남교구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Francois X. Maresca,1806~1855)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일부 학자들은 최 신부의 사제서품 장소를 상해 서가회성당 또는 김가항성당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인 두 번째 사제가 탄생하는 은총의 자리였다. 최양업은 부제품을 받은 후 5년 만에 만 28세 나이로 사제가 됐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메스트르 신부는 마치 전보를 치듯 단 두 문장의 짧은 편지를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다. “마침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지난 주일에 사제로 수품했습니다. 그는 곧 신부님께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상해에서 1849년 4월 17일 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아직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메스트르 신부가 1848년 9월부터 최양업 부제와 함께 페레올 주교가 정한 백령도로 갈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지시가 담긴 편지에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의 사제 서품을 허락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백령도 여행을 떠나기 보름쯤 전 최양업에게 사제품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백주일(부활 제2주일)에 지극히 공경하올 마레스카 주교님으로부터 저는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고귀한 품위에 언제나 합당한 자로 처신하게 되길 바랍니다. 저의 미천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 짐은 아주 감미롭고 고무적인 것인 만큼, 지극히 무능하고 가난한 제가 날마다 지극히 존엄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성제를 드리고, 온 세상의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값진 대가를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권능을 받았음은 큰 위로입니다"(1849년 5월 12일 자 상해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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