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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나의 기업] (26) 이순형 광헌 아우구스티노 (주)파워킹 대표

[나의 신앙 나의 기업] (26) 이순형 광헌 아우구스티노 (주)파워킹 대표

가난한 아이들 뒷바라지에 여념 없는 굴착기 수출 전문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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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발행 [1381호]
가난한 아이들 뒷바라지에 여념 없는 굴착기 수출 전문 기업인

▲ 이순형 (주)파워킹 대표는 해외 시장을 개척해 장비를 수출하는 데서 기업의 보람을 찾듯이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데서 삶의 보람을 맛본다. 이 대표가 수원 공장의 자동선반 설비 앞에서 회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장 힘들었을 때 성당이 보였다. 9개월 동안 매일 미사에 참석했고, 1년 6개월 만에 세례를 받았다. 빈첸시오회 활동을 시작했고, 가난한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앙은 그에게 삶의 의지처가 됐고 그는 아이들에게 희망의 싹이 돼 주었다. (주)파워킹 이순형(광헌 아우구스티노, 65)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수원 출신이다. 수원농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농대를 나왔다. 농사가 아니라 농기계가 전공이었다. 당시 최고 직장인 동아건설에 입사했고 돈을 더 벌고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했다. 귀국해서는 중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캐터필러에 취직했고, 그 후 국제상사로 옮겼다. 중기계, 판매, 구매 등과 관련된 분야였다.

1980년대 중반 국제상사가 어려움을 겪자 자립을 계획했고,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회사를 차렸다. 가스기기 회사였다. 창업의 기쁨도 잠시 대형 폭발사고로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누구 말대로 사장 ‘님’이 사장 ‘놈’이 돼 도망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됐다.

사업을 정리하고 방황 속에 새 길을 모색하며 지내던 1991년 어느 날, 평소처럼 서울에서 남태령을 넘어 과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15년 동안 그 길을 다니면서 무심코 지나쳤는데 그날따라 성당이 보였다. 과천성당이었다. 무작정 들어갔다. 3층 대성당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흘렀는지 성당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미사가 시작됐다. 첫 미사에 참석하고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성당에는 이때가 처음이었지만 개신교회에는 몇 번 갔었지요. 아내(김신옥, 60)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입니다. 불쌍한 이웃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대단히 감명 깊었고 나도 봉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하지만 교회에 나가는 것은 제게 맞지 않은 것 같아서 그만뒀지요.”

그날 이후 이 대표는 거의 매일 미사에 참석했다. 9개월쯤 됐을 때 레지오 마리애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제야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미 예비신자 교리반이 시작한 뒤여서 몇 달을 더 기다려 새로 시작하는 교리반에 들어갔다. 성당에 첫발을 내디딘 지 1년 6개월 만에 세례를 받았다.

봉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례를 받고 나서는 빈첸시오회 활동에 끌렸다. 성당 주변에는 비닐하우스촌을 비롯해 단독 주택 지하 셋방 등에서 힘들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 빈첸시오회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눔과 봉사의 의미를 체득했다. 청소년 교육에 관심이 컸던 부친의 영향을 받았는지, 특히 가난한 아이들에게 눈길이 갔다. 부친은 수원공고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세례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면서 수산중공업에서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5년 후인 1997년 IMF 외환 위기가 왔고 그는 실직했다. 갈 데가 없었다. 이제는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무실을 구할 돈도 없으니 집 거실을 사무실로 꾸몄습니다. 전 직장에서 쓰던 486 컴퓨터 한대, 쓰레기장에서 가져온 헌 책상과 의자, 그리고 10개월 할부로 들여온 70만 원짜리 복합기(프린터, 복사기, 팩시밀리) 한 대가 전부였습니다.”

건설 분야, 특히 암벽을 깨거나 터널을 뚫는 공사에 사용하는 굴착기를 전문으로 수출하는 파워킹(Powerking)의 시작이었다. 학생 때의 전공, 직장 생활에서 쌓은 노하우와 국내외 많은 연고가 밑천이었다. 안면 있는 곳마다 창업 인사를 하고는 매일 정장을 차려 입고 안방에서 거실로 출근했다. 해외 바이어들에게서 주문이 오기 시작했다. 전문 기술직으로 인맥을 쌓고 신뢰 관계를 구축해 온 것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 바위를 깰때 사용하는 다양한 드릴들.


“일거리가 생기면서 직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남의 집 거실로 출근하려 하겠습니까. 마침 직장을 구하던 조카딸이 있어서 출근하라고 했지요. 한 달 후에 또 일손이 달리더군요. 이번에는 남자 직원을 채용했습니다.”

조카 딸은 안방으로, 남자 직원은 거실로 출근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급하게 주문이 들어왔는데 맞는 물건이 없을 때는 영등포의 중장비 골목을 샅샅이 훑다시피 해서 물건을 구했다. 어렵사리 물건을 찾아냈지만 구입할 돈이 없을 때도 있었다. 사장에게 외상으로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가져가라고들 했다. 믿음이 생긴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사업에는 인간 관계, 특히 신뢰가 절대적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이 대표는 돈이 생기면 무조건 빚부터 갚았고, 남으면 투자했다. 6개월이 지나면서 작은 사무실을 얻을 보증금이 생겼다. 3년째가 되면서는 해외 출장을 다닐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7년이 지나서는 작은 공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15년이 지나서는 과천에 사옥을 마련했다. 지난해에는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수원산업단지에 공장을 신축, 이전했다. 현재 직원 20명에 연 매출 100억 원대의 알찬 중소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사업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이 대표는 짬을 내 빈첸시오 활동을 계속 했다. 특히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가난하다고 교육을 받지 못하면 가난이 대물림된다. 이 대표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없도록 하자고 다짐했다. 여건이 되는 대로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장학금을 지원하고, 가정 방문 등을 통해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더 정성을 쏟았다.

이 대표는 또 우연한 기회에 서울구치소를 다닌 것이 계기가 돼 2000년부턴 본당과 관련이 있는 안양교도소를 다녔고 2004년부터는 교정사목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교도소의 청소년들을 보면서 이 대표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교도소 소양 교육을 가서 보면 기본이 전과 3범이고 평균 학력이 중퇴입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교도소에 다시 들어올 일은 없을 것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역 사회의 가난한 학생들, 교도소 청소년들, 이들이 모두 이 대표에게는 소중한 희망들이다. 이 대표는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한 나눔과 장학 사업을 모두 하느님 사업이라고 부른다. 이 하느님 사업에만 매년 수천만 원을 쓴다.

“하느님 사업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제 돈을 벌게 해주십시오 하면 되지 않지만, 하느님 사업에 쓰겠다고 하면 다 들어주십니다.”

그는 지난 8월 하순에도 15명에게 11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전해 왔다. “제가 이 맛에 살아요!”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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