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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연구자 김구정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연구자 김구정

<4> 평양교구의 평신도 전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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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8 발행 [1379호]
<4> 평양교구의 평신도 전교사

▲ 1933년 평양성당(관후리성당)에서 열린 제1회 평양교구 전교사 강습회. 1931년부터 평양교구에서 전교사로 활동한 김구정은 이 강습회에서는 고정 강사가 될 만큼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아랫줄 왼쪽 네 번째가 김구정이다.





김구정은 예수님이 세속의 일을 완성하던 나이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에게 일하는 터전을 제공한 곳은 평양교구였다. 그는 전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전교사로 시작해 「가톨릭연구」 창간 멤버가 된다.

당시 평양교구는 생기발랄한 교구였다. 평안도 지역에서도 박해 기간 천주교에 대해 듣고는 있었다. 그 후 교회는 박해를 이겨내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고, 설명만 제대로 한다면 새로운 신앙의 가르침을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시절을 맞았다. 그런데 서울교구에서는 평안도 지역에 충족할 만큼의 성직자를 보낼 수가 없었다. 천주교가 피 흘린 뒤 미처 사람을 보내지 못하는 평안도에서는 개신교가 추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메리놀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는 1911년 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미국 내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1916년 메리놀회 총장 월시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한국 진출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원래 조선 교회는 교구 분할 때 대구교구에 3분의 1의 자원을 배분하면서 북부 지역에도 새로운 교구를 설립할 예정이었다. 뮈텔 주교는 평안도 지방을 메리놀회에 위임했다. 메리놀회는 1922년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평안도의 포교권을 위임받고, 이듬해부터 그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다.



전교사 활동 적극 장려한 평양교구


늦게 출발한 평양교구는 일꾼이 필요했다. 더욱이 교구가 인수받은 자원은 본당 7개, 대신학생 3명과 소신학생 8명이 전부였고, 서울교구 소속인 김성학 신부가 파견 나왔을 뿐이었다. 이에 교구는 전교사(전교회장) 제도에 주목했다. 전교사는 유급 활동원으로 교회의 전문 인력이었다. 이들은 본당이나 공소 신자들에게 교리교육을 하고, 비신자나 개신교 신자들과 대면했다. 특히 전교사는 가톨릭 선교가 성공할 수 있으리라 판단되는 지역에 미리 들어가 터전을 닦는 일을 했다. 교회는 이들을 통해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교회 소식을 전달하고 신자촌 상태를 파악했다. 전교사는 교리도 잘 알고 외교인을 설득시킬 웅변술도 갖춘 전위대원이었다.

김구정을 평양으로 부른 사람은 김성학 신부인 듯하다. 김성학 신부는 대구교구가 설정될 때까지 대구교구 지역에서 일했고, 평양교구가 탄생할 때는 메리놀회 신부들의 자문역을 담당했다. 그는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이 논의될 무렵인 1922년 평양성당(관후리성당)으로 옮겨가 평양교구 신설을 도왔다. 1927년 평양교구가 설정되고 평양성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지정된 다음, 평안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서울교구 신부들은 복귀했으나 그는 평양교구에 남았다.

이후 그는 1927년부터 2년간 영유본당, 1931년부터 1934년까지는 서포본당에 있었다. 평양, 영유, 서포본당은 모두 교구에서 비중 있는 중요한 본당들이었다. 영유성당 사제관에는 새로 파견된 메리놀회 신부들이 우리말과 풍습을 익히는 한국어 학교가 있었다. 즉 새 선교사들의 선교지 적응 훈련 장소였다. 그리고 서포는 새로 교구청이 들어선 곳이었다. 교구청사는 1931년에 준공됐고, 서포본당은 그보다 1년 앞서 교구청사 옆자리에 신설됐다. 그는 이곳의 초대 주임이었다.

김성학 신부는 신자가 없는 서포 지역을 사목할 때 전교사의 활동을 적극 장려했다. 또 신자들의 신심 운동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영유본당에 있을 때 이미 회장단 합동 피정을 실시했다. 이 합동 피정은 해마다 이어졌다. 김성학 신부 자신이 피정 강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김구정은 이때 김성학 신부와 함께 대중 강연과 잡지 출간에 관여하게 됐다.



신학교에서의 배움이 밑거름이 되어

김구정은 평양본당의 전교사 여섯 명 중 한 명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1931년에는 박천 지방의 전교사로 파견됐다. 교구는 전교사를 통합 관리하면서 필요한 본당에 일정 기간 소속시키고 있었다. 메리놀회에서는 한국 진출 초기부터 전교사를 고용했는데, 물론 전교사가 평양교구만의 제도는 아니었다. 다만 평양교구의 전교사 활동이 훨씬 대규모고 조직적이었다. 평양교구는 본당마다 작게는 1명, 많게는 15명의 전교사를 뒀는데 일반적으로 여성 전교사가 남성 전교사보다 많았다. 평양교구의 유급 전교사 수는 1928년 89명, 1939년 103명으로 신자 수에 비해 높은 비율이었다. 반면에 대구교구 전교회장은 1927년 24명. 1933년 52명이고 무급 전교회장까지 합해야 100명 정도였다.

김구정은 전교사들 가운데 탁월했다. 그는 대중 강연 강사로 발탁됐다. 1933년 제1회 평양교구 전교사 강습회부터는 고정 강사가 됐고 곳곳에 초빙됐다. 1934년 평양의 관후리와 신리 두 본당 공동 주최 복자성월 강연회에 그는 양기섭 신부와 함께 초빙됐다. 그는 ‘세계 사상과 가톨릭 사상’을 강의했다. 1936년 진남포성당에서 열린 교리 강습회에서는 김구정이 3일 내내 수강자들을 지도했다. 김구정은 전교사로 일하면서 지방 곳곳의 신자들과 소통했고, 신자들에게 긴요한 지식을 설득시키는 인재로 인정받았다.

한편, 모리스 교구장은 교구 행사를 전 교구적으로 펼치고 동시에 인력을 조직적으로 묶어 평신도들에게 다양한 활동 무대를 제공했다. 1933년 제1회 전교사 강습회, 1934년 가톨릭운동연맹 결성, 그리고 1935년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 대회는 평신도 조직화의 계기가 됐다. 본래 전교회장은 교리에 정통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교구마다 이들의 교육에 주력했다. 서울의 블랑 주교는 이미 1889년 ‘순회 전교회장 양성 학교’를 설립한 바 있었다. 대구의 드망즈 주교는 직접 전교회장 피정을 지도했다. 물론 평양교구도 전교사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모리스 교구장은 1933년 서포 교구본부에서 제1회 평양교구 전교사 강습회를 개최했다. 이후 이 교육은 ‘하기 가톨릭 대학’이란 이름으로 지속되는데,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에서 개최해 나갔다.

가톨릭운동연맹은 1934년 서포 교구청에서 열린 평양교구 평신도대회에서 결성됐다. 모리스 교구장은 교황 베네딕토 15세(재위 1914~1922) 이래 강조되던 가톨릭 운동(액션)을 평양교구에서 실천하고자 이 연맹을 결성했다. 교구관리소에 중앙부를 두고 본당에는 지회, 공소에는 분회를 설치하며 교구장이 총재가 되고, 홍용호 신부가 의장으로 임명됐다. 연맹은 교리 강습회나 묵상회 등으로 신자들의 신앙 실천을 주도해 나갔다.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은 1935년 10월 초 3일간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 경축 대회’를 거행했다. 이 대회에는 교황대사 마렐라 대주교와 전국 다섯 개 교구 주교가 참여했다. 첫날은 교황대사 환영 대회와 제등행렬, 둘째 날은 경축 미사 및 교리 경시 대회와 기념 축하회, 대회 마지막 날에는 대운동회와 병인박해에 관한 성극을 했다. 행사 중에는 가톨릭 사료 전시회도 열렸다. 전국에서 6000명의 신자가 모였다.

원래 평양은 프로테스탄트의 움직임이 활발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천주교가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해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평양 시민들은 교황대사 일행이 평양역에 내리자 이탈리아 황제인지 로마 황제인지 궁금해 했다. 1년에 한두 번 신부를 만나던 공소 신자들도 교황대사와 조선 각지의 주교를 한꺼번에 뵙는 영광에 도취됐다. 제등행렬을 보느라 밤잠을 설친 시민들은 조선 14만 신자가 다 모였다며 언제부터 천주교인이 이렇게 많았느냐고 경탄했다. 이 행사를 기해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천주교는 계급을 타파하고 새 문화를 수입하게 한 공로가 있다고 설파했다. 조선일보는 천주교의 사회사업을 주목하면서, 자신이 믿는 신조에 충실하고 꾸준히 곤란과 박해를 넘어 나아가는 조선 천주교 순교자의 태도에서 현대인들은 배울 바가 많다고 주장했다.

김구정은 교구의 활동 현장에서 활약했고 호소력 있는 문장으로 기록해 나갔다. 평양교구 교세는 10년 사이 3배 이상 성장했다. 신자들 마음속에 일어난 자신감은 훨씬 더 컸다. 교구는 평신도들의 기를 살려줬고, 신자들은 전 교구적 공감을 창출했다. 수도자나 성직자는 교구의 경계를 넘어가기 어렵다. 그러나 평신도 김구정은 타 교구의 전통과 현상을 이해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그리고 그는 평양교구와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가 됐다.



드망즈 주교와의 재회


천주교 전래 150주년 경축 대회 둘째 날 드망즈 주교는 미사에서 강론을 했다. 김구정은 이날 드망즈 주교를 주교관에서 대회지인 평양성당으로 안내했다. 그는 모리스 주교의 전용 자동차 안에서 드망즈 주교를 만났다. 주교는 김구정에게 “너는 너의 성소를 (사제 성소가 아닌) 다른 일로서 잘 수행하고 있다”고 격려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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