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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6> 성 샤스탕 신부 고향, 마르쿠

[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6> 성 샤스탕 신부 고향, 마르쿠

한복 입은 샤스탕 신부 유리화가 은은하게 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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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8 발행 [1363호]
한복 입은 샤스탕 신부 유리화가 은은하게 빛나

▲ 샤스탕 신부가 세례성사를 받고 첫 미사를 봉헌했던 마르쿠성당 내부 모습.

▲ 샤스탕 신부의 생가. 현재는 성인의 막내 여동생 후손이 집에서 살고 있다.

▲ 샤스탕 신부의 막내 여동생 후손인 피에르 마르탱씨가 성인의 서한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알프스라 하면 눈 쌓인 높은 산봉우리와 푸른 잔디밭, 양에게 풀을 뜯기는 목동 등을 떠올린다. 알프스 산맥 끝자락인 프랑스 동남부 지역 ‘마르쿠’(Marcoux)에도 양을 치던 소년이 있었다. 부모에게 전교를 위해 중국으로 떠난 오드마르 주교의 이야기를 자주 들은 소년은 후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선교사가 됐다. 그는 조선에 천주교를 전하다 1839년 4월 동료와 함께 순교했고, 145년 후 한국 교회의 성인이 됐다. 성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1803~1839) 신부다. 성인이 두고 온 고향은 어떤 곳일까.



처음 마주한 마르쿠는 그림엽서 속 풍경 같았다. 너른 초원, 듬성듬성 보이는 낡은 집, 눈 내린 산까지. 여행에 지쳐 있던 몸과 마음이 아름다운 모습에 새롭게 깨어났다. 프랑스 동남부 딘느레방(Digne-les-Bains) 지역에서 약 8㎞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 마르쿠. 장시간 버스 이동에 피곤해 하던 순례단원들도 감탄을 내뱉으며 너나 할 것 없이 마르쿠의 경치를 카메라에 담았다.



첫미사 봉헌한 마르쿠성당

농촌 마을 정취에 취해 걷다 작은 돌산 아래 자리한 ‘마르쿠성당’을 찾았다. 태어난 지 3일 된 샤스탕이 유아 세례를 받은 곳이자 사제품을 받고 1826년 12월 26일 첫 미사를 봉헌한 곳이기도 하다.

성당을 이루는 벽돌 크기가 균일하지 않았다. 1000년의 세월을 지내오며 보수한 흔적이었다. 내부 벽돌도 까맣게 변한 탓에 마치 동굴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복을 입은 샤스탕 신부가 그려진 색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만이 성당 안을 밝힐 뿐이었다. 제대 옆에 놓인 샤스탕 신부 성인화도 눈에 띄었다.

한쪽 벽면에는 성인화와 103위 순교 성인화ㆍ103위 시성 기념 사진ㆍ샤스탕 신부의 조선 입국 경로가 담긴 지도 등이 함께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성당을 찾은 신자들이 성인에게 전구를 청하며 켜 놓은 촛불이 빛을 내고 있었다. 크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샤스탕 신부를 현양하는 프랑스 신자들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날 마르쿠본당 주임 크리스티앙 비앙(Christian Vian) 신부가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순례단 소식을 듣고 성당을 방문했다. 프랑스 내에 사제가 부족해 여러 본당을 함께 맡고있는 상황임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 순례단을 만난 것이다.

비앙 신부는 “한국 신자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삶과 영성을 깊이 연구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존경스럽다”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 “프랑스 신자들이 샤스탕 신부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별로 없어 안타까웠다”면서 “최근 프랑스 교회가 성인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기념관을 만들고 연구하는 등 현양 사업이 프랑스에서도 시작되고 있다”고 알렸다.



후손이 지키는 생가

마르쿠성당에서 블레온느 강을 건너 약 1.5㎞ 거리에 성인의 생가가 남아 있다. 현재는 샤스탕 신부의 막내 여동생의 후손인 피에르 마르탱(Piere Martin)씨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대대로 생가에서 살며 집을 보존해 온 덕에 크게 훼손된 곳은 없었다. 낮은 돌담, 파스텔톤 외벽, 빨간 기와지붕. 프랑스 농촌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집 모습이었다. 또 창고 한쪽 편에는 샤스탕 성인이 어릴 적 가족들이 사용했다는 화덕도 남아 있었다. 생가 외벽에는 1984년 샤스탕 신부가 시성됐다는 내용이 담긴 현판이 붙어 있었다.

순례단을 반갑게 맞이한 마르탱씨는 집안에서 샤스탕 신부의 편지 등 자료를 꺼내와 하나하나 설명했다. 마르탱씨는 “그 시절에 이곳에서 조선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뿐더러 그 당시 그렇게 멀리 떠난 사람이 없었다”며 “그런 의미에서 샤스탕 성인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라고 전했다. 또 “최근 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면서 “샤스탕 신부님이란 특별한 분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마르탱씨는 “살아생전에 생가를 다른 사람에게 파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끝까지 생가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성 샤스탕 신부는 누구인가

성 샤스탕 신부는 1826년 딘느교구 소속 사제로 수품한 후 이듬해인 1827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그해 동양 선교사로 임명됐다. 이후 페낭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던 성인은 1837년 서양인 선교사로서 두 번째로 조선 땅을 밟았다.

샤스탕 신부는 작은 박해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상복 차림으로 남쪽 지방 교우촌을 방문하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비밀리에 교회를 돌봤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충청도 교우촌에 숨어야 했다. 하지만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자수하면서 두 신부에게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남겼고, 두 신부는 주교의 편지를 읽고는 즉시 관헌에 자수했다. 그리고 1839년 9월 21일 샤스탕 신부는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와 함께 서울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 효수 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후 그들과 함께 1984년 5월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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