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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뭉치에서 사제 그리고 주교로, 모두 주님의 이끄심

사고뭉치에서 사제 그리고 주교로, 모두 주님의 이끄심

배기현 주교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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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1 발행 [1362호]
배기현 주교 삶과 신앙

▲ 배기현 주교 돌사진.

▲ 고1 세례식 후 찍은 기념사진. 둘째 줄 왼쪽 끝이 배기현 주교.

▲ 광주가톨릭대 1학년 때 찍은 가족 사진. 뒤편 오른쪽이 배기현 주교.

▲ 마산 월남동성당에서 봉헌한 첫미사. 왼쪽은 고 장병화 주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고, 고교 시절에는 정학만 네 번을 당했다. 결석을 밥 먹듯 했고, 가출도 했다. 좋게 표현하면 ‘자유인’, 요즘 말로는 ‘탈선 청소년’이었다. 오로지 용돈을 받기 위해 고1 때부터 성당을 다녔고, 어쩌다가 신학교까지 가게 됐지만,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학년을 마친 후 뛰쳐나왔다. 공식적인 ‘자퇴’는 아니었지만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사고뭉치’였던 그는 휴학, 재입학 끝에 12년 만에 사제품을 받았고, 지난 4월 19일에는 제5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됐다. 극적인 반전이다. 배기현 주교가 자신의 주교 임명을 두고 몇 번이나 “기가 차다”고 한 이유다.

경남 진주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배 주교는 5살 때부터 마산(현 창원)에서 자랐다.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던 어머니 전풍자(모니카, 1998년 선종)씨는 개원의였고, 종교가 없었던 아버지 배덕환(요셉, 2013년 선종)씨는 대학 영문과 교수였다. 남부러울 것 없는 풍족한 집안이었다.

어머니 병원 바로 옆에 마산 월남동성당이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성당에 들러 아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고 일을 시작했다. 개신교 신자였지만 같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에 장소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배 주교가 종교라도 가져서 마음을 잡길 바라며 “성당에 다녀라”고 권유했다.

용돈을 받는 조건으로 월남동성당에 가기 시작한 배 주교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세례를 받았다. 당시 ‘콘스탄틴 대제’를 다룬 영화를 감명 깊게 본 그는 세례명을 ‘콘스탄틴’으로 정했다. “성당을 안 가면 용돈은 없다”는 어머니 말에, 그래도 주일 미사는 억지로 참례했다.

고교 졸업 후 재수를 하던 배 주교는 날마다 기도하던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3년을 오갔던 성당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는지, 문득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 늘 자녀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유’를 강조했던 어머니는 개신교 신자였지만 배 주교의 신학교 입학을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대건신학교(현 광주가톨릭대학) 학장이었던 이경우(가브리엘, 2013년 선종) 신부는 면접에서 빵점에 가까운 교리시험 점수와 학적부의 빨간 줄(정학)을 보고 “네가 어떻게, 왜 신부가 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저는 친구를 좋아하는데,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와 방에 혼자 앉아 있으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찾아가면 ‘왜 쓸쓸한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깊은 신앙을 가진 어머님 영향도 받았습니다.”

진심 어린 답변 덕분이었는지 배 주교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배 주교의 신학교 입학은 본당 신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당시 월남동본당 신자였던 최영선(안나, 67)씨는 “신자들이 ‘저 망나니 같은 애가 무슨 신학교를 가느냐? 절대 오래 못 있는다’라고 확신했다”고 기억했다.

신학교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특히 아침 미사 참례는 정말 고역이었다. 미사에 거의 매일 빠졌다. 당시 한 교수 신부는 당시 마산교구장 장병화(요셉, 1990년 선종) 주교에게 “1년 넘게 지켜봤는데, 신앙심은 일점일획도 없는 것 같다”는 내용의 평가서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배 주교를 아꼈던 장 주교는 편지를 읽자마자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 모른 체했다.

2학년 1학기, 더는 견디지 못하고 신학교에서 나왔다. 어머니가 가장 마음 아파했다.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끝까지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 후 천주교로 개종(改宗)하기도 했다.

배 주교는 신학교를 휴학하고 군에 지원했다. 배 주교는 “그동안 너무 편하게 호강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신학교에 돌아가려면 심하게 고생해야 한다고 생각해 제일 힘든 부대에 지원했다”고 회고했다.

공수부대에서 낙하 훈련을 하다가 허리와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 그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평생 허리통증을 안고 살았다. 지금까지 수술만 11번을 받았다. 전역 후 배 주교는 달라졌다. 신학교에 돌아왔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1985년 마침내 사제품을 받았다. 어머니는 “죄 많은 집안에서 신부가 나왔다”며 눈물을 흘렸다.

월남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는데, 사람들은 배 주교가 신부가 됐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배기현 사제 서품’은 당시 ‘마산고 3대 미스터리’ 중 하나였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1989년 유학을 떠나 1996년까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부산가톨릭대학 교수를 지내고, 교포사목(미국 덴버), 사천ㆍ덕산 본당 주임, 교포사목(미국 LA)을 거쳐 2015년 1월부터 교구 총대리 겸 사무처장을 맡았다.

배 주교는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은 어머니의 신앙, 그리고 정달용 신부님”이라고 말한다. 항상 수입의 절반 이상을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었던 어머니는 사람들 눈에는 ‘문제아’로 보였던 배 주교에게 자유를 줬고, 문제를 일으켜도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줬다. 다만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머니는 1976년 소록도로 들어가 한센인들을 치료해 줬다. 1981년에는 ‘용신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배 주교도 방학 때마다 소록도에서 생활하며 한센인들과 함께했다. 배 주교는 소록도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신학교 재학 당시 교수였던 정달용(대구대교구 원로사목자) 신부는 ‘인생의 스승’이다. 신학생들을 한없이 사랑해 주고 아껴준 정 신부는 항상 다른 이를 섬기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도 틈틈이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배 주교가 “나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지명한 이연학(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도회) 신부는 “배 주교님은 천성적으로 다른 이를 보살펴 주는 걸 좋아하시고, 아픔에 공명(共鳴)하시는 분”이라며 “당신의 허약함, 약점을 잘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제 성소가 쇄신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배 주교는 65세에 은퇴해 ‘거리의 악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는 “주교가 되는 바람에 (꿈이) 다 끝나 버렸다”며 아쉬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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