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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5) 제5대 조선대목구장 성 다블뤼 주교 고향, 아미앵

[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5) 제5대 조선대목구장 성 다블뤼 주교 고향, 아미앵

성인 주교가 보살핀 조선 교회, 이젠 프랑스에 사제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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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4 발행 [1361호]
성인 주교가 보살핀 조선 교회, 이젠 프랑스에 사제 파견

▲ 어린 다블뤼가 세례받을 때 사용한 세례대와 선교 여정을 표현한 그림이 생르 성당 뒤편 기도소에 설치돼 있다.

▲ 다블뤼 주교의 조선 입국과 순교까지를 그림으로 그려 넣은 성해함. 한국 신자가 제작해 봉헌했다.


▲ 다블뤼 주교가 어릴 적 세례받은 생르 성당에서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순례단이 기도를 바치고 있다.



시의원인 아버지. 공장을 소유할 정도의 경제적 풍요로움. 신앙을 중요시하는 집안 분위기. 7세에 라틴어 공부 시작. 10세 때 예수회 기숙사 학교 입학.

제5대 조선대목구장 성 다블뤼(St. Marie Antoine Nicolas Daveluy, 1818~1866) 주교의 이야기다.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왜 가난하고 박해받는 조선의 선교사가 되기로 했을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성 다블뤼 주교가 어릴 적 신앙을 키운 프랑스 아미앵(Amiens)을 찾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북쪽으로 약 140㎞ 떨어진 곳, 피카르디 지방 솜 주의 주도 아미앵이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성당과 종각,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작가 쥘 베른의 집 등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도시다.

아미앵은 일찍이 도시로 발전해 지역의 수도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크기는 작아도 없는 것은 없다. 백화점과 마트 등 현대식 쇼핑센터와 옛 성당과 수도원, 근대 건물들이 섞여 묘한 세련된 분위기가 흘렀다.



생르(St. Leu) 성당


서쪽 영국 해협으로 흘러드는 솜(Somme)강은 아미앵을 관통해 흐르고 있다.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작은 강줄기와 맞닿은 곳에 어린 다블뤼가 세례받은 생르 성당이 보였다.

큰 성당은 아니었지만 종탑 곳곳에 세밀하게 조각된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까맣게 변해 버린 외벽은 조각의 화려함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그을린 자국이었다. 다블뤼 주교의 어릴 적 추억과 함께 시대의 아픔도 간직한 장소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태극기였다. 2005년 서울대교구 갈현동본당 신자들이 아미앵을 방문해 전달한 것이었다. 성당 뒤편은 성인을 기리는 기도소로 꾸며져 있었다. 기도소엔 어린 다블뤼가 세례성사를 받을 때 사용한 세례대도 놓여 있었다. 세례대 뒤에는 조선에 발을 딛기까지 여정을 표현한 그림도 함께 걸려 있었다. 또 갈현동본당 신자들이 선물한 현수막도 이곳에 걸려 있었다. 현수막 속 적힌 손글씨가 함께한 순례단 마음을 울렸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나 됩시다.’ 순례단은 잠시 의자에 앉아 주모경을 바쳤다.



아미앵 노트르담(Amiens Notre Dame) 주교좌성당

아미앵에서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높은 성당 지붕만 찾으며 걸어도 금방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딕 건축의 ‘파르테논 신전’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화려한 조각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성당 외관은 순례단을 압도했다. 고개를 들어도 지붕 끝이 잘 보이지 않았다. 중앙 문 위에는 ‘최후의 심판’이, 문 양쪽으로는 열두 사도의 모습이 조각으로 표현돼 있었다. 성당 안팎을 둘러싸고 있는 조각은 3600여 점. 각기 다른 생김새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성당 내부 넓이는 7700㎡, 축구장 크기였다. 아치형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은 마치 동화에 등장하는 거인 같았다. 내부 곳곳엔 요한 세례자의 생애 등 성경 내용을 표현한 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눈으로 읽는 돌로 만든 성경이였다.

성당 가장 안쪽 벽면에 걸린 그림 속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성 다블뤼 주교와 조선 신자들을 표현한 작품이다. 하얀 주교관을 내려놓고 두 손 모은 다블뤼 주교와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가 그려져 있다. 그 아래엔 한국 신자가 제작해 봉헌한 성해함이 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입국부터 순교까지 일대기를 그려 넣은 빈 성해함이었다. 다블뤼 주교의 성해는 본당에서 따로 보관 중이었다.

안내를 맡은 아미앵주교좌본당 보좌 김지훈(서울대교구) 신부는 순례 내내 밝은 표정이었다. 사제가 없이 고통받는 조선 교회를 위해 몸소 뛰어든 다블뤼 주교와 사제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프랑스 교회를 위해 선교를 지원한 김 신부, 두 사제가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한국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외국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받은 것을 갚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위해 애쓴 프랑스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고 보존하는 것 또한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요.”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성 다블뤼 주교는 누구인가


성 다블뤼 주교는 1841년 사제품을 받고 1843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그는 1845년 중국 김가항성당에서 봉헌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김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했다.

1857년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주교품을 받은 다블뤼 주교는 내포 지방 선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1866년 3월 7일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면서 다블뤼 주교는 제5대 조선대목구장이 됐다. 하지만 3월 30일, 대목구장 재임 23일 만에 충청도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후에 주교의 유해는 서울 절두산순교성지에 안치됐다. 다블뤼 주교는 1984년 5월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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