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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4)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고향 ‘샤토 뒤 루아르’

[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4)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고향 ‘샤토 뒤 루아르’

성인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그 선교 열정만은 뚜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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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0 발행 [1359호]
성인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그 선교 열정만은 뚜렷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인 루아르 강은 남쪽 세벤 산맥에서 발원해 중서부를 지나 서해 비스케만으로 흘러든다. 특히 강의 중앙 부분인 ‘루아르 계곡’은 땅이 비옥하고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곳. 이곳엔 앙부아즈성을 비롯한 중세, 르네상스 시대 고성 80여 개가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 삼아 줄지어 모여 있다. ‘프랑스의 정원’이란 별칭을 가진 곳답다.

루아르 계곡 근처에 자리한 투르(Tours)와 르망(Le Mans) 지방 사이 소도시 샤토 뒤 루아르(Chateau Du Loir)가 있다. 네 번째 여정지, 제4대 조선대목구장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1814~1866) 주교의 고향이다.

▲ 샤토 뒤 루아르 성당 내 경당. 베르뇌 주교를 위한 기도문이 펼쳐져 있다.

▲ 베르뇌 주교의 이름을 딴 거리. 성당 오른편 골목길이다.

▲ 샤토 뒤 루아르 성당 안에 있는 세례대. 베르뇌 주교가 세례 받은 곳.

▲ 베르뇌 주교의 뼈조각이 담긴 성해함.



“댕~ 댕~ 댕~”

성당 종소리였다.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종소리는 계속해서 마을 안을 채웠다. 그 은은한 울림의 근원지를 찾아 거리를 걸었다.

건물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하얀 벽에 검은색 지붕을 올렸다. 남쪽 지방 집 지붕이 낮고 편평했던 것과 달리 샤토 뒤 루아르의 집 지붕은 높고 뾰족했다. 건물들 사이로 십자가 달린 성당 종탑이 눈에 들어왔다. 베르뇌가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을 보낸 ‘샤토 뒤 루아르 성당’이었다.



사제가 되겠어요


고딕 양식의 성당이지만 위압적이진 않았다. 외벽 전체를 노란색으로 칠한 덕에 오히려 정감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앞장서 뛰어들어가는 키 작은 베르뇌를 상상하며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색 유리화를 통과한 오색 빛이 대리석 현판에 내려앉았다. 베르뇌 주교가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해 본당에서 설치한 현판이다. 그 아래에 어린 베르뇌가 세례받은 세례대가 놓여 있었다.

유독 낡은 의자가 눈에 띄었다. 제단 왼편 경당 앞에 놓인 신자석이었다. 베르뇌 주교의 어머니는 아들이 선교지로 떠난 후 매일 가장 앞줄 의자에 앉아 기도했다고 한다. 동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주교의 어머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뜻을 기억하며, 이 자리에서 주님께 아들을 맡기는 기도를 바치지 않았을까.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순례단도 그 자리에 앉아 기도하며 성인의 편지글을 떠올렸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성무에 불충하느니, 그보다 오히려 제가 백 번 천 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계실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슴에 남은 흔적들


성당 밖 오른쪽 골목은 1984년 이후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성 베르뇌 거리’ (Rue Saint Simeon Berneux). 이 골목 근처에 베르뇌 주교 생가터가 있기 때문이다.

흰색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집에 주교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주교가 살았던 집은 아니었다. 화재로 생가가 소실되고 새로 지어진 집이었다. 순례단은 아쉬운지 연신 표지만 카메라에 담았다.

남아 있는 주교의 흔적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고향 신자들 마음속에는 분명 남아 있었다. 베르뇌 주교의 순교일 하루 전인 3월 6일, 샤토 뒤 루아르본당 사제단과 신자를 비롯해 르망교구장 이브 르 쏘(Yves Le Saux) 주교, 인근 본당과 파리 한인 본당 신자 등 250여 명이 모여 베르뇌 주교 선종 150주기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프랑스 교회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적은 수가 아니었다. 이날 미사는 한국어와 불어로 진행됐다. 행사 규모와 관계없이 한국과 프랑스 신자들이 함께 주교의 선교 열정을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자리였다.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샤토 뒤 르와르 본당 주임 부르노 델라로쉐 신부





“베르뇌 주교님의 삶과 영성을 프랑스 교회에 알리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할 겁니다.”

베르뇌 주교 선종 150주기 추모 미사를 기획한 샤토 뒤 루아르본당 주임 부르노 델라로쉐(Bruno Delaroche) 신부가 말했다. 델라로쉐 신부는 2012년 부임한 이후 베르뇌 주교에 대한 연구와 현양 사업을 꾸준히 준비, 실행해 왔다.

“베르뇌 주교님 고향 본당이면서도 아무런 현양 활동이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자료가 많지 않아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주교님에 대한 연구는 보편 교회의 역사 안에서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델라로쉐 신부는 지난해 10월부터 베르뇌 주교 유물전을 주교의 모교와 교구청 등에서 순회 전시 중이다. 또 오는 9월 25일에는 한국 순교자 현양 대회를 열 계획이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의 선교 방향도 그려나갈 겁니다. 10월에는 프랑스 주교회의 주교단과 함께 한국을 방문합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를 좀더 이해할 기회가 될 것 같아 매우 기대됩니다.”

백슬기 기자



베르뇌 주교는 누구인가



1837년 사제품을 받은 베르뇌 주교는 2년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이듬해 통킹으로 떠났다. 베트남 정부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주교는 프랑스 해군의 도움으로 풀려나 다시 중국 선교를 위해 요동으로 갔다가 1854년 제4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돼 2년 후 조선에 입국했다.

베르뇌 주교는 10년의 사목 기간 동안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개최해 사목 서한을 신자들에게 발표하고, 인쇄소를 설치해 교회 서적 보급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1866년 3월 7일 사학을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후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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