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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2)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고향, 마리냔

[프랑스 선교사들의 고향을 가다] (2)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고향, 마리냔

한국 프랑스 신자들이 함께 되살리는 순교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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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7 발행 [1357호]
한국 프랑스 신자들이 함께 되살리는 순교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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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액상 프로방스(Aix en Provence)와 항구 도시 마르세유(Marseille) 사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하나 있다. 마르세유 프로방스 공항이 자리한 ‘마리냔’(Marignane)이다. 바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Imbert Laurent Marie Joseph, 1796∼1839) 주교의 고향이다.


▲ 앵베르 주교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카브리에 성모 탄생 성당.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가 순례단에게 앵베르 주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앵베르 주교의 유해가 담긴 성해함. 현재 성 앵베르 성당에 있다.

마리냔에서 태어난 아이


마리냔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가로수에는 꽃망울이 달려 있었다. 심심치 않게 야자수도 보였다. 공항 주변 도시인만큼 도로와 건물은 깨끗했다. 높은 빌딩 대신 낮은 지붕에 빨간 기와를 얹은 주택들이 대부분이었다.


마리냔 외곽 브리카르(Bricart)로 접어들자 건물보다 푸른 들판이 자주 보였다. 들꽃이 가득 핀 곳을 지나 오래된 회색 건물 한 채를 찾았다. 앵베르 주교의 생가였다. 색이 바래고 허름해졌지만, 일부를 수리했을 뿐 당시 건물 그대로였다.


주교의 부모는 여행 중에 이곳에 들러 어린 앵베르를 낳았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796년. 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프랑스 교회는 자유주의 정부와 마찰을 빚으면서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어린 앵베르는 집 근처 물레방앗간에서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 세례를 받아야 했다.


아쉽게도 물레방앗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해 속에서 태어난 앵베르 주교가 먼 나라 박해에 뛰어들어 순교 성인이 됐음을 알리는 현판은 생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주교의 피가 스민 새남터 순교성지 흙이 담겨 있었다.

 

▲ 앵베르 주교 생가.


▲ 생가에 걸린 현판. 아래 동그란 부분에 새남터 순교 성지 흙이 담겨 있다.


가난한 소년이 신학생이 되기까지


마리냔에서 동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자리한 카브리에(Cabriès) 마을.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이 작은 마을엔 옛 성문과 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을 입구 언덕을 따라 오래된 집들이 빈틈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성벽을 따라 난 골목길 끝자락에 성당이 있었다. 어린 앵베르가 다닌 ‘성모 탄생 성당’이다. 12세기에 지어진 성당은 100여 명이 들어갈 정도로 아담했다. 천장은 아치형으로 쌓아올려 꽤 높은 편이었다.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랜 하얀 벽돌에서는 고고한 멋이 흘렀다.


앵베르는 이 성당에서 인생을 바꿔 준 중요한 인물을 만났다. 당시 본당 주임 아르노 신부다. 빈곤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앵베르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했다. 돈이 없어 마을 사람에게 글을 배우기도 했는데, 아르노 신부는 앵베르의 이런 열의를 보고 기초적인 것을 가르쳐 학교에 보냈다. 이 인연으로 앵베르는 액스 교구 신학교에 진학했고, 후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 1819년 사제품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성 앵베르 주교가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한 성당”이라고 자랑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순례단은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치며 한국 교회를 위해 성인에게 전구했다.

 


고향에서 이어지는 현양 사업


마리냔에는 앵베르 주교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다. 바로 ‘성 앵베르 성당’이다.


한국 순례자들을 위해 전례 봉사자가 제대 위에 성 앵베르 주교의 성해함을 올려놓았다. 2004년 서울대교구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시성 20주년을 기념해 액스 교구에 전달한 성인의 유해 일부이다. 제대 뒷벽은 조선과 프랑스 전경이 펼쳐진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다.


현양회 순례단과 함께 프랑스 현지인들로 이뤄진 ‘성 앵베르 기념 사업회’ 회원들이 미사에 참례했다. 성 앵베르 기념 사업회는 1984년 앵베르 주교가 시성된 이후 마리냔 지역 30개 본당 신자들이 결성한 현양 모임.


장 프랑수아 모렐 회장은 “시성식을 계기로 앵베르 주교님에 대한 공경심이 커지면서 주교님 고향인 이곳에 본당을 짓고 기념회를 설립해 활동하게 됐다”면서 “앵베르 주교님을 잊지 않고 현양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한국 신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앵베르 주교의 삶과 영성을 강의한 최홍준(파비아노) 전 한국평협 회장은 “선교사들과 선조들이 흘린 피 위에 우리 한국 교회가 세워졌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앵베르 주교는 누구인가


성 앵베르 주교는 1837년 5월 제2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돼, 그해 12월 주교로서 최초로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모방ㆍ샤스탕 신부와 서울ㆍ경기 등지에서 활동하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또 한국어 기도서를 제작하고, 「기해일기」의 토대가 된 「1839년 조선 서울의 박해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배교자의 밀고로 입국 사실이 발각되자 1839년 8월 박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수해 모방ㆍ샤스탕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2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조선 입국 후 2년이 채 되지 않는 사목 기간 동안 앵베르 주교는 조선 교회의 교계적 틀을 바로 세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앵베르 주교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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