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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대담/ 가르멜회 윤주현 신부와 조계종 혜민 스님

특별 대담/ 가르멜회 윤주현 신부와 조계종 혜민 스님

우리 안에 있는 ‘자비의 마음’ 찾아내 주위 어려운 이웃에게 다가가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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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7 발행 [1348호]
우리 안에 있는 ‘자비의 마음’ 찾아내 주위 어려운 이웃에게 다가가 함께하자




구도(求道)의 길을 걷는 두 수도자가 마주 앉았다. 각자 신앙은 다르지만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아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한다는 점에선 닮아 있는 이들이다. 가르멜회 윤주현 신부와 조계종 혜민 스님이다.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은 5일 서울 수유동 가르멜 여자 수도원에서 만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선한 만남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교황이 선포한 ‘자비의 해’를 맞아 성사된 자리다. 자비의 해를 사는 가톨릭교회 수도자와 자비를 진리 그 자체로 여기는 불교의 스님이 나눈 대화를 통해 이 시대 자비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진행자 없이 두 ‘고수’가 자유롭게 나눈 대담을 정리해 소개한다. 대담은 평화방송 TV에서도 설 특집으로 방영될 예정이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사진=이힘 기자 lensman@






윤주현 신부는 맨발의 가르멜 남자 수도회 소속 수도사제로 이탈리아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부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페인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에서 신비신학과 가르멜 영성 코스를 전공했다.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 교수를 지냈으며 대구 가르멜 수도원 원장을 맡고 있다. 대전 가톨릭대 교수이기도 하다. ‘가르멜 총서’ ‘가르멜의 향기’ ‘가르멜 산책’ 시리즈를 창간했다. 가톨릭 교회 안팎에서 가톨릭 영성과 가르멜 영성을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





혜민 스님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 석사, 프린스턴대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에서 석사 과정 중에 출가를 결심해 조계종 승려가 됐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햄프셔대에서 종교학 교수를 지냈으며 「젊은 날의 깨달음」「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펴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멘토로 활약 중이며 현재 서울 인사동에 ‘마음치유학교’를 열어 고통받고 아픈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 윤주현 신부와 혜민 스님이 수도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윤주현 신부는 혜민 스님을 서울 가르멜 수도원으로 초대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수도 생활을 하는 이들이 사는 곳이니만큼, 두 수도자가 만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봉쇄 수녀원은 일반 사람들 출입이 제한된 곳이지만, 윤주현 신부와 혜민 스님의 만남에 원장 수녀도 이날만큼은 흔쾌히 수녀원 문을 열었다. 혜민 스님 역시 특별한 장소에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음에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윤 신부와 혜민 스님은 어떻게 수도자의 길을 들어서게 됐는지를 묻고 대답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윤주현 신부(이하 주현) : 이번 기회를 통해서 스님이 대단하신 분이심을 알게 됐다. 일찍 미국으로 건너가 많은 공부를 하셨던데, 미국에 가게 된 계기가 있는지.



혜민 스님(이하 혜민) : 원래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영화감독이 돼 볼까 하는 생각에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사람은 왜 태어났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정의는 어디로 간 건지. 이런 질문들을 많이 생각했다. 교과서는 많이 안 보고 서양 철학책들, 동양 고전들을 읽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종교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주현 :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고민을 했다. 가장 단순하면서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 질문들.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한 생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는지. 그런 질문이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왔다.



혜민 : 왜 이렇게 중요한 질문을 학교에서 얘기도 안 하고 가르쳐 주지도 않고 토론도 안 하는지, 정말 희한하다.



주현 : 저도 여러 철학책을 읽으면서 이런 고민들을 풀었는데 그러면서 점차 교회 안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됐다. 원래 어렸을 땐 개신교 신자였는데, 목사보다는 사제의 삶이 구도의 삶에 온전히 투신하는 길이라 생각해 개종하게 됐다. 여러 고민 끝에 가르멜 수도회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다.



혜민 : 사회적 성공, 이런 것들이 영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 일시적일 뿐이었다. 삶이 계속 변하고 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삶이란 게 돈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게 이게 다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 길을 가게 됐다. 불교 가르침을 통해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는 수도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때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수도자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았다. 응접실 안을 가득 채운 어색함은 서서히 사라지며 분위기는 한결 편안해졌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무르익으며 서로의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와 자비의 이야기로 옮아갔다.



혜민 : 오늘 이야기 나눌 주제가 자비다. 자비라는 얘기를 처음 딱 들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자비하려면 일단 나 스스로 자비로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잘 안 되니 남에게도 자비를 베풀기가 힘든 것 같다. 가톨릭 교회 안에선 자비와 관련된 가르침이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주현 : 아주 풍요롭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을 이야기할 때 하느님과 관계성 안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삶의 출발과 완성이 하느님에게 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 모습대로, 당신 모상대로 창조했다고 나온다. 하느님의 모상. 인간이 하느님의 품격을 가지고 창조됐다는 걸 드러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혜민 :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됐지만, 보통 사람들은 내 안에 있는 하느님 모상을 다 잊어버리는 듯하다. 나의 죄, 부족함, 온전하지 못함, 이런 것들을 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 모상이라기보다는 부족함이 많은 존재라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이런 점을 넘어서서 하느님 모습을 자각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주현 : 이 부분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와 현대 심리학이 말하는 자존감과 깊이 연관돼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무엇보다도 기도를 통해서,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 자기 존재의 본래 모습을 끊임없이 깨닫도록 권고한다.



혜민 : 기도라고 하면 어떤 기도가 있는지.



주현 : 기도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되는 것은 성경이다. 그리스도교는 성경 안에 하느님께서 인류를 향해 전해주신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성경에 담긴 하느님 마음과 인류를 향한 하느님 구원 계획과 행적을 봐야 한다.



혜민 : 그러면 성경의 구절을 깊게 묵상하는 게 기도가 될 수 있는가.



주현 : 기도의 방법은 다양하다. 렉시오 디비나도 있고, 영신수련도 있고, 성녀 데레사식 묵상기도 등 많다. 물론 일반 신자들이 성당에서 가서 바치는 기도도 있다. 자신의 일상을 하느님과 나누고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과 소통하는 것도 훌륭한 기도다.



혜민 : 사람들은 스스로를 죄가 많다고 생각한다. 의도하지 않게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장사를 하다 보면 또 거짓말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도는 무엇이 있을까.



주현 : 가톨릭 교회에는 성사라는 게 있다. 하느님 은총과 자비를 신자들에게 전해주는 통로와 같은 것인데, 그중에 고해성사가 있다. 죄를 사해주는 성사다. 근본적으로 하느님 용서를 체험하고 하느님 사랑과 자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 된다.



혜민 : 그런데 기도를 하다 보면, 자기 소원을 말하기 바쁘다. 불교 신자들의 경우 내가 기도를 많이 하고 노력하면 부처님께서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을 자신이 컨트롤하려는 것이다. 이건 자기 중심에서 시작되는 기도다.



주현 : 가톨릭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성당에서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가 대부분 그런 기도일 것이다.



혜민 : 그건 자기 기도를 하는 거지 하느님의 소리, 부처님의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기도가 깊어지면 기도의 중심이 나에게서 하느님과 부처님 쪽으로 옮겨지는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불성의 소리를 더 들으려고 한다. 그러려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많아야 하고 자연스레 침묵으로 흐르는 게 아닌가 싶다.



주현 : 침묵은 들음이고 이것이야말로 기도의 가장 근본적 자세다. 어떻게 하면 내 삶에서 보다 더 하느님 뜻을 구현할 수 있을까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말이 더 필요가 없어진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했을 때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로도 깊은 교류를 하는 것과 같다.



불교 신자나 가톨릭 신자나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은 듯하다. 바라고 청하는 것. 그런 기도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두 수도자는 사람들이 좀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랐다. 그러면 마음 안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의 자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었다. 기도 이야기에서 본격적으로 자비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다.



혜민 : 궁금한 것이 있다. 종교를 믿으면 더 자비롭고 온화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듯하다. 사랑이신 예수님 모습보다는 심판하는 무서운 아버지와 같은 모습에 집중해 다른 사람들을 지적하며 너는 이게 문제고, 그러면 지옥 가고…. 이런 말들을 많이 한다.



주현 : 심판은 하느님의 영역이다. 스님께서 말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본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선 심판하고 벌을 주기도 하시지만, 넓게 보면 이 또한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표현하는 한 방식이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야단치고 회초리를 드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 하느님 자비를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불교에선 자비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혜민 : 불교에선 자비가 진리의 당체(當體, 바로 그 자체)로 본다. 진리가 있고 자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비가 바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의 경우는 진리 그 자체라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한정된 어떤 형상이 아니라 깨어 있는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이다.


주현 : 그리스도교에서도 하느님을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결국, 같은 믿음이라고 본다. 우리만 진리고, 저쪽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면 그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고백하는 하느님, 유다교의 하느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모두 같은 분이다. 진리는 만인에게 보편적인 것 같다.

 

혜민 : 불교에선 또 자비가 지혜와 항상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날개로 비유하면 한쪽 날개는 자비고 한쪽 날개는 지혜다. 두 날개가 균형을 이뤄야 잘 날 수 있는 법이다. 지혜만 많고 자비가 없으면 사람들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도 도움을 주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비가 많고 지혜가 없으면 사람들의 괴로움과 아픔을 볼 때 그 괴로움과 아픔이 전부라고 착각해 거기에 휩쓸리는 경우가 있다.


주현 :그럼 불교에선 어떻게 구체적으로 자비를 구현하거나 표현하는지.

 


혜민 : 대승불교에서는 부처가 되기 전에 보살계라고 해서 보살에 서원한다. 모든 중생이 다 깨닫기 전에는 내가 부처가 되지 않겠다라는 서원이다. 중생을 다 구원하고 마지막에 성불하겠다는 뜻인데, 결국 세상 끝날까지 사람들을 돕겠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눴던 하느님의 자비 얘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

 


주현 : 성경에는 하느님 자비에 관한 이야기가 구구절절 나온다. 성경 내용은 앞서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 구원 계획이 드러나는데,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우상을 섬기기도 하고 속을 많이 썩였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모습이 나온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스라엘 한 민족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 계획으로 본다.

 


혜민
: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거대한 서사보다는 구체적인 것에서 자비를 더 가깝게 느끼는데, 하느님 자비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무엇이 있는지.

 


주현 : 맞다.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느님 자비를 드러내는 정점에 있는 분이다. 또 공생활 3년 동안 하신 일들은 주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죄인들, 세리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함께하면서 식사하고 술도 마시면서 그들을 당신 품 안에 받아들이셨다.

 


혜민 : 그렇다. 창녀에게도, 병자에게도 다가가셨다.

 


주현 : 그런 부분들이 역사 안에서 시대가 지나도 하느님 자비를 우리에게 정말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구체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혜민 : 세상 사람들 기준에서 보면 부족한 점이 많아도 성경에서 예수님 행적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더 힘들고 고통받고 가난하기 때문에 하느님 사랑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주현 :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이 말씀은 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일수록 더 간절히 하느님을 염원하고 하느님을 자기 존재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거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하느님과 더 친한 것 같다. 실제로 하느님 구원 역사를 보면 하느님은 당신 일을 이뤄가는 데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선택해서 구원 역사를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혜민 : 가톨릭 교회가 자비의 해를 지낸다고 했는데, 어떻게 세상 속에서 자비를 발현할 수 있는지 듣고 싶다.


 

주현 :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칙서 「자비의 얼굴」을 통해 자비의 해를 선포하셨는데, 칙서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니 여러분도 자비로워지십시오’다. 교황님은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먼저 체험하고, 체험한 자비를 적게는 이웃 사람과, 넓게는 사회와 세계 전 인류와 나누라고 하셨다.


 

혜민 : 특별히 가톨릭 신자들은 어떻게 지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는지.


 

주현 : 교황님께선 하느님 자비를 묵상하기 위해 순례하도록 많이 권하셨다. 지정된 성당을 순례하고, 고해성사도 보고, 미사에도 참례하고, 교황님 지향에 따라 인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순례하기를 강조하신 것이다.


 

혜민 :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자비는 무엇이 있을까.


 

주현 : 우리들 삶의 자리에선 많은 감정이 오간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일수록 쉽게 상처 주고 상처받고 서운해 한다. 이런 게 우리가 사는 모습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끌어안고 먼저 다가가 품고 안아줘야 한다. 또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소외된 사람들,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겠다.


 

혜민 : 이주 노동자들, 미혼모들, 동성애자들도 있다.


 

주현 : 소외된 여성들, 어린이들,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먼저 끌어안고 그들에게 가진 것을 나눠주고 그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격려해주고 동반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하느님 자비를 구현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혜민 : 그런 분들을 봤을 때, 나랑 다르다고 해서 섣불리 판단하고 ‘저렇게 살면 안 돼’라고 하면 안 된다. 그들과 함께 가야 한다. 제가 인사동에 마음치유학교를 하고 있는데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힘들어하는 분들을 위한 곳이다. 그분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제가 나서서 뭘 돕는다기보다는 그분들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이랄까, 부처님 불성이 살아나도록 자리를 마련해주면 되더라. 그럼 그 안에서 치유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어느덧 대담은 2시간을 훌쩍 넘겼다. 서로의 종교가 말하는 자비에 관해서 이해하고 존중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태도에서 종교 간 대화의 진정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자비뿐만이 아니라 서로의 수도 생활에 대해서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한정된 시간이 야속할 뿐이었다. 또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신자들을 위한 덕담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혜민 : 우리 한 명 한 명은 부족하고 죄도 많고 온전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안에 그런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사랑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 시선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 것이다. 불교에선 내 안에 온전하지 못한 부분도 사랑으로 감싸주는 그러한 시선을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 언어로 하면 하느님이 시선이 아닐까 싶다. 내 안에 있는 따뜻한 자비의 시선을 꼭 느끼시길 바란다.


 

주현 : 우리가 최선을 다해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얼마나 함께 연대하고 관심을 가졌는가. 이것이야말로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잊거나 모른 채 살아간다.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주위의 소외된 이웃들을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고 그들과 함께 걷는 마음을 가지면 아름다운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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