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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나의 기업] (12) 안재영 수산나 (주)잠뱅이 대표

[나의 신앙 나의 기업] (12) 안재영 수산나 (주)잠뱅이 대표

삶과 사업은 오르락 내리락해도, 믿음과 나눔은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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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9 발행 [1323호]
삶과 사업은 오르락 내리락해도, 믿음과 나눔은 쭈욱

▲ 안재영 잠뱅이 대표가 서울 송파구 방이동 잠뱅이 빌딩 1층 매장에서 청바지를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청바지와 인연을 맺었고, 남편과 인연을 맺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신앙과 나눔에 새롭게 눈을 떴다. 남편과 함께 토종 청바지 브랜드 ‘잠뱅이’ 시대를 열었다. 시련은 계속됐으나 극복해냈다. 새로운 일이 생기면 이제는 묻는다. ‘나를 또 어디에 쓰시려고 이러시는 걸까.’ 안재영(수산나, 63) 잠뱅이 대표 이야기다.





평생 반려자 그리고 청바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성당에 나가 그해 겨울 서울 후암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졸업 후 바로 동네 봉제공장에서 일을 배웠다. 5년 후에는 청계천의 청바지 제조업체로 진출할 수 있었다.

당시 청계천 피복공장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은 전태일 분신 사건(1970년)을 촉발했고, 안씨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 가입해 활동했다. 한 살 위 직장 동료도 함께 JOC에 가입했는데, 그가 남편인 고 김종석(안드레아, 2005년 선종) 잠뱅이 창업주다. 8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 사이에 남편은 독립해 작은 봉제공장을 차렸고, 안 대표는 그 공장 직원이었다.

1980년 부부는 남대문에 매장을 열고 독자적인 청바지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청바지를 만들었고, 안씨는 매장을 지켰다. 장사는 잘 됐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토종 브랜드 청바지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토종 청바지 이름을 ‘잠뱅이’로 지었다.



쉼표와 신앙 되찾기

1985년에는 상표 등록을 마쳤고, 그해 늦가을 이화여대 입구에 잠뱅이 매장을 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접고 말았다. 새벽같이 나와 매장을 지키던 안씨가 쓰러진 것이다. 3개월 동안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을 정도의 중병이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친척들이 마지막이라고 여겨 모두 병원에 다녀갔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8살, 7살의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차마 떠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살려주시면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는 삶을 살겠다고….”

3개월 후 가까운 친지의 주선으로 절두산성지 부근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차츰 차도가 생겼다. 그러면서 절두산성지 미사에 참례하기 시작했다. 처녀 시절엔 본당에서 청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봉사를 했는데, 결혼 후 일에 매달려 발바닥 신자로만 지내온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게다가 고부간의 갈등도 심했다. 일에 치여 몸과 마음 다 지칠 때로 지쳤다. 결국 마음에서 생긴 병이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 안씨는 하느님께 한 약속을 지키기 시작했다. 감사 헌금 봉헌을 시작으로 성소후원회를 비롯해 여러 사회복지단체에도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레지오에도 가입하고 ME(매리지 엔카운터)도 다녀왔다. 몸은 힘들었지만 모처럼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이때 시작한 안씨의 매일 미사 참례는 지금까지 빠짐없이 계속되고 있다.



오뚜기처럼 일어나 나눔 시작

도움을 줄 곳을 찾던 중 1987년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당시 천사들의 집 원장)를 만나 후원을 약속, 매달 1t 트럭 한 대분의 청바지를 원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 후원은 3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원주에 아직도 잠뱅이 매장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3년 부부는 다시 이화여대 앞에 잠뱅이 1호점을 냈다. 이번에는 날씨가 문제였다. 손님이 많을 때인 주말마다 궂은 비가 내리는 일이 8주간 계속됐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씨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한동안 고전하던 잠뱅이는 입어본 사람들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차츰 인기를 타기 시작했다. 대리점을 열겠다는 신청이 잇따랐다. 1999년 잠뱅이는 대한민국 소비문화대상 소비자 만족상을 수상했고, 2000년에는 매출이 1000억 원을 넘었다. 대리점 수는 140개까지 늘어났다.



시련의 시간들… 행복 전도사를 꿈꾸며

사업이 번창하면서 안씨의 나눔도 계속됐다. 도움을 호소하는 곳에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외면하지 않았다. 돈으로 도와줄 수 없으면 잠뱅이 옷으로 지원했다.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곳이 20여 곳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못마땅해 하던 남편도 나중에는 흔쾌히 동참했다.

2004년 남편의 암 투병이 시작됐다. 안씨는 남편 대신 대표를 맡아 남편 병간호와 회사 운영을 함께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회사 매각을 권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남편도 그런 말을 했지만 안 대표는 남편의 말이 본심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회사 운영과 관련, 사기를 당해 수억 원을 물어내야 했다. 2년 가까이 직원들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할 정도로 자금난에 시달렸다. 대금 결제가 제대로 되지 않자 거래업체들이 등을 돌렸고, 일부 대리점들은 다른 브랜드로 매장을 교체했다.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를 믿고 고통을 분담해준 협력업체들, 대리점주들,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저를 신뢰해 주었기에, 책임감을 갖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두 아들(장남 김명일 요셉, 차남 김광일 니콜라오)도 회사에 합류해 힘을 보탰다. 2008년 회사는 다시 흑자로 돌아섰다. 안 대표는 2013년 중소기업인대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안정적 성장을 계속하면서 각종 후원과 기부 활동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잠뱅이는 현재 직영점을 포함해 전국에 120개 매장을 두고 있으며, 두 아들은 각각 총괄이사와 생산기획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안 대표를 돕고 있다. 안 대표는 에코행복연구소라는 곳에서 40주간의 행복학교를 수료하고 최근 행복 코치 2급 자격증을 땄다.

“행복 전도사가 되고픈 욕심이 있습니다만, 모르지요. 일은 제가 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그분이시니까요.”

글·사진=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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