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덕원의 순교자들] (35) 마리아 에바 슈츠 수녀
사랑 가득하고 뛰어난 손재주 지닌 ‘어머니 수녀’
2014. 06. 01발행 [12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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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가득하고 뛰어난 손재주 지닌 ‘어머니 수녀’


마리아 에바 오이게니 슈츠 수녀(M. Eva Schutz)

▲출생: 1899년 4월 10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교구 베른리트 암 슈타른베르거 제

▲세례명: 오이게니

▲입회: 1924년 2월 12일

▲첫서원: 1926년 8월 30일

▲한국 파견: 1926년 9월 4일

▲종신서원: 1929년 9월 13일

▲소임: 원산 수녀원 수련장, 부원장, 신고산 분원장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11일 원산수녀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8월 10일 옥사덕수용소

▲ 원산 수녀원 독일인 수녀들이 1925년 12월 입회한 한국인 첫 지원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에바 슈츠 수녀(왼쪽 검은색 수도복)가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수녀원 재봉실에서 한국인 수련자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 에바 오이게니 슈츠 수녀는 한국의 모든 이와 모든 것을 사랑한 수도자였다.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한 수녀에게 감동한 한국인 수련자들과 교리와 바느질을 배우러 온 여성들은 모두 수녀를 어머니처럼 따랐다. 또한, 수녀는 원산수녀원 부원장직을 세 차례, 수련장을 두 차례 역임할 만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수도자였다.



탁월한 선교사

슈츠 수녀는 1899년 4월 10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교구 베른리트 암 슈타른베르거 제에서 태어나 툿찡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는 중등 실업학교 졸업 후 재봉사로 일하다 1924년 2월 12일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에 입회했다. ‘에바’라는 수도명으로 수련을 시작한 그는 1926년 8월 30일 첫서원을 했고, 닷새 만인 9월 4일 북한 원산 선교지로 파견됐다.

선천적으로 유순한 에바 슈츠 수녀는 탁월한 선교사였다. 수녀는 처음부터 소녀들과 여성들을 맡아 교리와 수예, 가사교육을 했다. 특히 수녀원에 입회한 한국인 지원자들에게 걸레를 짜는 법부터 바느질, 뜨개질, 자수까지 꼼꼼하게 가르쳤다.

“15살부터 18살의 지원자가 이미 16명이나 있다. 수녀원의 공동생활은 자고 앉고 일하는 것이 그들의 집에서 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집에선 그냥 온돌에 자던 그들은 수녀원에 오자마자 나무 침대에 짚을 채워놓은 매트리스에서 자야 했다. 긴 의자와 걸상이라는 것도 지금까지 몰랐고, 유리창 청소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고향 초가집에선 방바닥에 기름종이를 바르고, 창문에는 그냥 종이를 붙인다. 그래서 청소 걸레를 사용하고 쥐어짜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배운 대로 따라 하느라 애쓰는데도 좀처럼 잘되지 않는 기묘한 광경이 종종 벌어진다”(마틸다 히르슈 수녀, 1927년 원산연대기 중에서).

1929년 9월 13일 원산성당에서 종신서원을 한 슈츠 수녀는 선교를 위해선 한국말과 한국인의 심성을 알아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누구보다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외교인과 한국말로 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한국인 청원자들과 함께 마을을 다니며 교리를 가르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에바 슈츠 수녀는 주일 오전에 한 무리의 여성에게 교리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다른 마을로 가서 가르친다. 평일 오후에도 비어 있는 유치원에 여성들을 불러모아 바느질을 가르쳤다. 한국 여성들이 다양한 한복뿐 아니라 그들에게 생소한 유럽식 의복도 바느질하고 수선하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누구나 자유롭게 에바 수녀를 만날 수 있었다”(1931년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연대기 중에서).



바느질로 공산 치하 수녀원 생계 유지

원산수녀원은 1933년 3월 함경도 산간지역의 외교인 일색인 소도시 신고산에 첫 분원을 설립하고 에바 슈츠 수녀를 분원장으로 파견했다. 수녀는 신앙교육과 가사를 재치있게 결부시켜 큰 호응을 얻었다. 이곳에서 과로로 폐렴과 심장병에 걸린 수녀는 병중에서도 자기 직무에 최선을 다했으며 주어진 기회를 살려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1942년 가을 폐렴 재발로 원산 본원으로 복귀한 슈츠 수녀는 오래 쉬지도 못하고 1943년 5월 함흥 성심의원 분원장으로 다시 파견됐다.

하지만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과 소련군의 북한 점령 이후, 북한 공산당이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성 베네딕도회의 선교 활동도 막을 내렸다. 공산당이 원산수녀원 유치원과 해성학교, 빈민학교 등을 강탈해 가자 원산으로 복귀해 수녀들의 생계를 위해 소련군을 상대로 의상실과 옷수선실을 열었다. 슈츠 수녀의 바느질 솜씨가 알려지자 소련군 장교 부인들이 프랑스 패션 잡지를 수녀원으로 가져와 유행하는 옷을 맞춰 입었다.

“소련군 재봉 일은 우리의 구명줄이었다. 장교 부인들이 매우 만족해 값을 후하게 쳐줬을 뿐 아니라 각종 식료품도 가져다주면서 우리를 돕고 기쁘게 해 주려 애썼다”(슈미트 크리소스토마 수녀, 1946년 증언 중에서).



옥사덕수용소에서 순교

1949년 5월 11일 한밤중 정치보위부원들이 원산수녀원에 쳐들어와 독일인과 한국인 수녀들을 갈라놓은 후 독일인 수녀들을 평양인민교화소로 압송했다. 석 달 후 1949년 8월 수녀들은 독일인 수사들과 함께 옥사덕수용소로 옮겨져 갇혔다. 이곳에서 수도자들은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폐와 심장이 약했던 에바 수녀는 옥사덕수용소로 이송될 때 실신해, 카누토 신부와 함께 달구지에 실려 옮겨졌다. 수녀는 수용소에서도 바느질했다. 하지만 부종으로 1949년 성탄절 이후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병상 생활을 해야 했다. 다리에는 밤낮으로 진물이 흘렀고, 고열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1950년 8월 10일 51세로 숨을 거뒀다. 수녀들은 슈츠 수녀의 시신에 베일과 화관을 씌우고 옥사덕수용소에서 조금 떨어진 허물어진 섶나무 움막에 안장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의 증언

“에바 슈츠 수녀는 원산 수녀원에서뿐만 아니라 본당에서도 활동했고, 세례를 준비했던 한국 여자들과의 교제에 특별한 애착과 재능이 있었다. 수녀는 체포되기 전에도 이미 병약했고, 심장이 약했다. 3개월간의 감옥생활이 수녀의 건강을 매우 해쳤고, 또 찌는 듯한 8월 더위 속에 수용소로 오는 힘든 노정이 또 다른 영향을 끼쳤다.… 1950년 8월 10일 제르투르다 수녀는 최소한 오전만이라도 죽어가는 동료와 함께 있고 싶다고 악독한 수용소 소장에게 저항했다. 그날 아침 곪은 상처에서 체액이 샘물처럼 흘러나왔다. 하느님께서 수녀님을 당신께 맞아들이실 때까지 우리는 함께 나직이 기도했다”(디오메데스 메퍼트 수녀 증언 및 「하느님이 함께하신 나의 생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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