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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산책]<54> 건축(11) 감실, 그리스도 몸이 계신 곳

[가톨릭 문화산책]<54> 건축(11) 감실, 그리스도 몸이 계신 곳

그리스도 성체 담고 있는, 교회의 살아있는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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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9 발행 [1255호]
그리스도 성체 담고 있는, 교회의 살아있는 '심장'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을 찾아가 당황하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이었다. 그러나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다"던 그리스도의 몸은 감실에 계시고, 영성체하는 내 손바닥에 놓이시며, 또 내 몸 안에 들어가 나와 함께 계신다. "아멘"이라 답하는 우리 안에 감실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신다.

 우리는 성당 안에 있는 상자처럼 생긴 작은 '방'과 그 옆에 켜 둔 붉은 등으로 성체가 현존하고 있음을 잘 알아차린다.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셔두는 작은 '방'을 교회는 감실(龕室)이라 부른다. 감실은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신자에게 성체를 영해 주고, 미사 때 제병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거나 미사 때 남은 성체를 보관한다. 또 감실은 육화한 하느님, 빵으로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흠숭하게 해준다. 이런 까닭에 교부들은 최초의 감실을 성모님이라고 표현했다. 이렇듯 감실은 그리스도교 신앙 체험의 근본이요 개인 영성을 자라게 하는 바탕이다.

▲ 성 알로이스 곤자가 오라토리 성당(1875), 옥스퍼드.
▲ 평화의 모후 순례성당(1972), 벨베르트 네비게스, 독일.


감실은 영어로는 'tabernacle'이라고 하는데, 이는 텐트라는 말의 라틴어인 '타베르나쿨룸'(tabernaculum)에서 나온 것이다. 하느님께서 '계약의 궤'를 모셔놓은 장막 안에 머무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계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막이 된다. 그래서 중세에는 '계약의 궤'가 있는 텐트처럼 생긴 것을 기억해내기 위해서 닫집이 덮인 제대, 성광, 성인의 유해를 담는 성해함이나 성사 탑, 성체를 담는 용기를 덮는 베일 등 다양한 모습으로 감실을 나타냈다.

 오늘날 모든 성당과 경당에는 반드시 감실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위치는 분명하게 규정돼 있지 않다. 벽 안에 감실을 고정하기도 하고 제대 가까이 두기도 하며 제대와 구분된 곳에 두기도 한다. 오랜 유럽 성당에서는 감실이 제대 위에 있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감실을 제대 위에 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옥스퍼드에 있는 성 알로이스 곤자가 오라토리 성당(The Oratory Church of St. Aloysius Gonzaga, 1875)의 감실은 제대 뒤 수많은 조각상이 새겨진 '레레도스(reredos)'의 중앙에 놓여 있다. 또 고트프리트 뵘이 설계한 독일의 벨베르트 네비게스(Velbert-Neviges)에 있는 평화의 모후 순례성당(1972)에는 제대와 완전히 따로 떨어진 넓은 경당에 우뚝 세운 탑 안에 감실을 두었다. 제단을 회중석에 가깝도록 낮게 독립적으로 놓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 경당은 약간 어두우며 장미가 그려진 창을 통해 비춰 들어오는 빛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다.

 감실에 대해 두 가지를 먼저 알아둬야 한다. 하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한동안 전례 공간의 중심으로 여겨왔던 감실을 원래의 자리로 보내고, 제대를 성체성사의 중심으로 다시 확인했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미사거행을 하는 제대보다 더 중요한 중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제대와 감실은 성체와 긴밀히 연결된 장소이며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감실도 그만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고, 감실은 그리스도 자신이신 성체를 담고 있다.

 그런데도 감실의 위치가 왜 이렇게 확정돼 있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감실을 둘러싼 역사적 변천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주교가 자신이 거행한 미사에서 축성한 성체에서 떼어낸 조각을 주교 미사에 참례할 수 없었던 본당 사목구 사제들에게 일일이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빡스 도미니'(주님의 평화)를 말하는 순간 성체 조각을 교황과 신자들의 일치 표지로서 성작에 넣었는데, 이를 '페르멘툼(fermentum)'이라고 한다. 한편 성당이 없던 시대에서 공동 집전이 가능하지 않을 때, 또는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이들이나 병에 걸려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기 위해서 개인의 주택에 성체를 보관해야 했다. 12세기 말 파리에서는 모든 성체는 자물쇠로 잠근 감실에 넣고 이를 제대 위에 놓게 됐으며,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아예 모든 교회는 잠근 감실에 성체를 둘 것을 정했다. 이렇게 되어 제대 위에 감실이 놓이게 됐다.

 그러나 9세기에서 11세기까지는 제대와 감실의 관련성을 고려해 제대 위에 '비둘기'라고도 하고 '픽스(pyx)'라고도 하는 작은 성합을 매달았다. '픽스'라는 말은 중세 후기의 기욤 뒤랑 주교가 사용했는데, 그는 장식함을 만드는 금과 은 등 보석을 그리스도 몸의 다른 속성으로 여겼다. 제대 뒤의 조각된 장식벽인 '레레도스'가 본격적으로 마련되자, 15세기 말에는 감실이 '레레도스'의 기본 요소가 됐다. 한편 12세기부터는 성체를 제의실 옆에 붙은 '사크라리움'(sacrarium)이라는 방에 둔 장에도 보관했다.

 중세에는 미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드렸고 죄인인 자신이 성체를 모시기 너무 어렵다고 여긴 나머지, 성체를 영하는 대신 성체를 '바라보는' 열망을 갖게 됐다. 이에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다음 신자들이 볼 수 있게 받들어 올리는 예식이 생겨났고,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담은 감실을 성당의 가장 고귀한 자리인 제대 위에 올려놓게 됐다. 우르바노 4세는 1264년 성체 축일을 제정하고 성체를 모시고 행렬했다. 이것이 성체현시와 성체강복으로 발전했는데, 성체 행렬을 하기 전과 후에 성광으로 제대 위의 성체를 현시했다. 14세기에는 크고 정교한 독립 구조물인 '감실 집'과 '감실 탑'이 성당 안에 세워졌으며, 그 안에 투명한 용기를 넣어 성체를 흠숭하기도 했다.

 17세기와 19세기까지는 성체 흠숭과 성체강복이 널리 퍼지면서 감실이 성체성사의 중심처럼 여겨지게 됐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감각은 그리스도의 희생 장소인 제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감실은 점점 더 커지고 더 정교하며 화려하게 장식되면서 결국은 제대를 압도하고 성당의 중심이 됐다. 공의회 이후의 현대식 성당에서도 여전히 감실이 주가 되게 설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공의회 이전의 이런 과정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화려하게 장식된 감실은 신자들의 열망에 따라 성당의 중앙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계심을 알리는 빨간 등을 늘 켜두는 관행이 생겼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제대를 성당의 가장 중요한 중심으로 여겨 감실을 제대와 분리시켰다. 그 대신 감실을 제단 뒤쪽 벽인 레레도스 안에 놓았다. 이렇게 되자 제대와 감실은 중세 초기의 매달린 성합과 제대의 관계와 비슷하게 됐다. 감실의 자리가 부당하게 제대를 압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놓임으로써 이 둘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제대 위가 아니라면 감실의 자리는 어디일까? 가능한 자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제단 위의 다른 자리이거나 아니면 따로 떨어져 만든 경당이다. 이 두 자리는 성체성사의 거행과 성체 보관 사이의 혼돈을 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오로 6세는 감실을 "우리 교회의 살아 있는 심장"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제대와 감실이 하나이면서 두 가지 측면을 가진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도 "희생의 성사, 영성체의 성사, 현존의 성사는 모두 하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성체조배는 개인적인 흠숭이고 전례 거행은 공적이라고 나누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체조배도 공동 행위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감실은 제단의 영역 안에 놓여야 한다. 그리고 닫집과 같은 덮개(캐노피),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벽감(壁龕, 니치), 작은 신전 모양(애디큘)이나 다른 건축적 장치로 감실과 제대를 각각 정당한 우월성과 존경으로 표현해야 한다. 제단의 중심에 놓인 제대는 전례상의 초점이며, 감실은 쉼의 상태를 말한다.

 성체를 보관하기 위한 경당이 생긴 것도 평면이 십자형인 성당에서는 교차하는 부분에 제대를 독립해 놓였고, 스크린으로 제단과 그 뒤에 있는 반원형 끝부분을 분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나 건축적으로 중요해서 또는 순례지라서 사람은 모여들어 미사를 계속 드려야 하는 성당에서는 따로 떨어진 경당을 진정으로 마음이 집중하면서도 우월한 장소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김광현(안드레아, 건축가,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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