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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32. 평양교구 중화성당

[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32. 평양교구 중화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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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3 발행 [1235호]

   지금이야 평양시와 합쳐졌지만, 평남 중화군은 '평양교구 신앙의 못자리'였다. 성직자들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의 거봉을 배출했다. 성직자로는 지학순(초대 원주교구장) 주교를 비롯해 김진하ㆍ유봉준(이상 서울대교구)ㆍ김광혁(청주교구) 신부 등을 냈고, 평신도 정치인으로는 제1공화국 국무총리와 부통령, 제2공화국 총리를 지낸 운석(雲石) 장면(요한 세례자, 1899~1966) 박사를 냈다.

 이처럼 화려한 신앙의 못자리가 된 데는 1850년대에 직접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전교했던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를 보좌한 김기호(요한)가 당시 중화 지방에 공동체(훗날 목재리공소)를 이룬 것이 밑바탕이 됐다.

 이때부터 중화 지방은 가톨릭교회가 평안도에 진출하는 데 일종의 관문 역할을 했고, 특히 목재리공소(영진공소라고도 불림) 공동체에선 병인박해 당시 윤 베드로와 이 마태오, 윤 바오로 등이 혹형을 당하기도 했다. 수십 년간 평안도는 물론 황해도까지 선교의 뿌리가 된 중화인 윤창혁(비오)의 역할도 지대했다. 1914년 일시 사리원본당 관할 공소로 있다가 1919년 진남포본당이 사목관할권을 갖게 됐고 평양지목구 설정 6개월 뒤인 1927년 9월 본당으로 설정된다.

 중화에 성당이 세워진 건 1934년 11월이었다. 본당 설립과 함께 3300여㎡(1000여 평) 성당 부지를 확보한 공동체는 1932년 2대 주임 발터 콜만 신부가 성당 신축에 들어가 2년 뒤 500여 명이 한꺼번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성당을 신축한다. 성당 전면부 왼쪽에 종탑을 세운 점도 특이하다.

 중화본당 공동체는 교구 내 가톨릭운동연맹 지회를 조직해 문맹 퇴치와 주일학교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성심유치원도 세워 유아교육에도 헌신했다. 이 공동체 역시 평양교구 주교관에서 요양을 하던 장두봉 신부가 일시 사목을 맡았다가 1949년 12월 12일 체포된 뒤 침묵의 교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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