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덕원의 순교자들]<15> 요셉 벤노 그라하머 수사

[덕원의 순교자들]<15> 요셉 벤노 그라하머 수사

아픈 이들 손 놓지 않았던 '파란 눈의 천사'

Home > 기획특집 > 덕원의 순교자들
2013.09.15 발행 [1232호]
아픈 이들 손 놓지 않았던 '파란 눈의 천사'

요셉 벤노 그라하머 수사 (Josef Benno Grahamer)

 ▲출생: 1888년 6월 1일, 독일 다하우 아이젠호펜
 ▲세례명: 벤노
 ▲한국명: 함요섭(咸要燮)
 ▲첫서원: 1910년 1월 16일
 ▲한국 파견: 1911년 1월 7일
 ▲종신서원: 1913년 3월 23일
 ▲소임: 서울 백동수도원 재단사, 문지기, 덕원수도원 진료소 책임 의사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4월 28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일/4일, 평양 인민교화소


'수도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늘 인정받았던 요셉 벤노 그라하머 수사.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 실용적 성향, 단순함을 지닌 그는 성 베네딕도회 서울과 덕원 수도원에서 문지기이자 재봉사, 진료소 책임자로 평생을 가난한 이와 걸인, 환자들과 함께한 파란 눈의 천사였다.
 

▲ 동료 김재환 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라하머 수사가 가난한 어린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 서울 백동수도원 숭공학교에서 그라하머 수사(왼쪽)가 한국인 학생들에게 재단 일을 가르치고 있다.

▲ 1934년 한복 차림의 그라하머 수사.


 6남매 중 4형제 수도자

 그라하머는 1888년 6월 1일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유명해진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에르드백 지역 다하우 아이젠호펜에서 소농이었던 시몬 그라하머와 크레스첸츠 본 사이에 태어났다. 세례명은 벤노.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넉 달 만에 세상을 떠나 어머니 홀로 6남매를 양육했다. 이들 가운데 둘은 성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됐고, 벤노와 형 클라버 신부는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입회했다.

 벤노 그라하머는 초등학교를 매우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학비가 없어 공부를 포기하고 재봉사 견습공이 됐다. 장인 시험에 합격한 그는 1906년 10월 21일 형 클라버의 첫서원식에 참례한 후 수도회 입회를 결심했다. 이 첫서원식이 있고 열흘 후 그는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입회 청원서를 썼다.

 "이미 3년 전부터 예수 성심과 선교에 저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꼈으나 제가 너무 어렸고 병을 앓고 있었기에 이 원의를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회복됐고 제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오직 수도회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그라하머 입회 청원서 중에서).

 그라하머는 1908년 1월 13일 '요셉'이라는 수도명으로 수련을 시작, 1910년 10월 16일 첫서원을 하고 석 달 뒤 1911년 1월 7일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또 1913년 3월 23일 종신서원을 했다.
 
 가난한 환자 돌보는 착한 사마리아인

 그라하머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수도원 숭공학교 교사로 재단 일을 가르쳤다. 이후 독일에서 외과 수술방에서 일하고 간단한 응급처치와 처방을 배웠다는 이유로 그는 수도원 진료소를 맡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육신과 영혼을 돌보는 치유자'로 소문이 났다. "용한 서양 의사가 공짜로 치료해 준다"는 말에 한 푼 없는 가난한 환자들이 매일 진료소로 몰려들었다. 오전 10~12시와 오후 2~4시로 정해진 진료 시간으로는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환자들을 말리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나도 너무 힘들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6시까지 줄곧 아이들의 비명과 울음, 환자들의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름에는 좁은 진료실에서 상처에서 나는 악취를 참아야 했다. 나도 탈진하곤 했고, 현기증 때문에 진료를 잠시 중단해야 했다.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환자를 치료했고 결과도 좋았다"(요셉 그라하머, 1930년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연감」에서).

 1928년 9월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경성제국대학병원 지원으로 외과 수술과 전문 의료 교육을 받은 후 시험에 합격, 일본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이후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더욱 퍼져 수도원은 1935년 병동까지 지었다.

 "멀리서도 온 환자를 포함해 일 년에 약 1만 8000명의 환자가 '병자들의 수사'로 알려진 요셉 수사를 찾아왔다. 그는 결코 미숙한 돌팔이가 아니었다. 많은 환자를 완치시켰고,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 대세를 줌으로써 하늘의 문을 열어줬다"(덕원 수도원 루치우스 로트 신부 보고서 중에서).

 1936년 그는 가난한 이를 찾아 진료하고 오던 길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얼굴에 깊은 상처가 나고 갈비뼈도 부러져 한동안 의식을 잃었다. 사고 후 건강이 급속도로 쇠약해졌지만 그는 언제나 제일 먼저 진료소로 나와 환자들을 돌봤다.
 
 수감 중에도 동료 간호


 해방 후 1949년 4월 28일 덕원의 모든 수도자가 체포되고 수도원이 폐쇄했다.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간호사 구타' 혐의로 체포했다. 물론 마리아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에게 '아이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씌웠던 것처럼 조작한 것이었다.

 수도자들과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에 갇힌 그라하머는 1949년 10월 15일 징역 5년형을 받았다. 뇌졸중으로 자기 몸을 가누기 힘든데도 그라하머 수사는 병든 동료 수도자들을 정성껏 간호했다. 그는 굶주림과 동상으로 숨을 거둔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의 몸이 다 식을 때까지 꼭 껴안고 있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의 진격으로 북한군이 철수를 시작하면서 평양 인민교화소의 수감자들은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살해됐다. 요셉 그라하머 수사도 1950년 10월 3일과 4일 사이에 살해됐고, 죽음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들의 증언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계단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그는 수도원을 찾아오는 수많은 걸인 중 하나였던 노인을 몇 푼 주며 쫓아버리지 않았다. 뼈만 남은 노인을 일으켜 정원 아래에 있는 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서둘러 부엌으로 가 물을 떠 왔다. 그런 다음 거룩한 세례성사를 통해 불쌍한 영혼이 모든 죄악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기도했다. 노인의 영혼은 고요히 육체를 떠나 창조주께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참생명을 얻었다"(암브로시오 하프너 신부, 1932년 상트 오틸리엔 「선교잡지」 중에서).

 "요셉 수사는 동료 수도자들의 귀한 목숨도 살려냈다. 티푸스와 이질에 걸린 선교사들을 깨끗이 낫게 해 줬다. 우리는 다른 의사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오딜로 본피히 수사, 1935년 「선교잡지」 중에서).

 "요셉 수사는 뇌졸중을 앓고 있다. 위장도 손상돼 소화기관으로 제구실을 못한다.… 아직 회복이 더딘데도 요셉 수사는 벌써 진료소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정말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1948년 11월 26일자 편지 중에서).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
오늘의 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