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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28>평양교구 의주성당

[이승구·조명혜 부부의 펜화성지순례] <28>평양교구 의주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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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1 발행 [1225호]


   조선은 성의 나라였다. 온 나라 방방곡곡에 흙성(土城)과 책성(柵城), 벽돌성(塼城), 돌성(石城) 등을 세워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특히 압록ㆍ두만강변 2000리 조선과 청의 국경은 청에서 책성을 세워 경계를 삼았다. 평북 의주 너머 구련성(九連城)에서 봉황성(鳳凰城) 사이에는 조선인이 청에 드나들기 위해 거쳐야 하는 책문, 곧 변문(邊門)이 있었고, 조선으로 들어오는 국경인 의주성 정문 앞에도 깃발을 꽂아 일종의 세관 내지 관문 역할을 하게 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1837년 12월 봉황성 변문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와 의주성을 우회한 뒤 성 남문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 서울로 갔으며, 김대건 신학생은 1842년 12월 의주성에 들어와 선교사들 입국 경로를 탐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905년 일제가 무단으로 압록강 철교를 세우고 신의주시를 건설한 뒤 1923년 도청 소재지를 신의주로 이전하면서 국경 관문으로서 역할은 사라졌지만, 조선 밀사들이 베이징을 왕래하던 통로이자 선교사들의 입국 경로로서 의주의 교회사적 의미는 퇴색되지 않았다. 1940년대까지 건재했던 옛 의주성은 이제 사진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평양교구 의주성당은 옛 순교선열들의 신앙 숨결을 기억하고자 해방 무렵까지 해마다 9월 복자성월(현 순교자성월)이면 의주성을 찾아가 성월 기도를 바치고 순교자 찬가를 부르며 순교자들을 기렸다고 전해진다.

 의주본당이 영유본당에서 분가해 설립된 것은 1911년 9월로, 초대 주임 서병익 신부는 본당 설정 6년 만인 1916년 순교선열들의 숨결이 녹아 있는 의주성 내 평북 의주군 의주읍 동의동 재고개 언덕에 6만6116㎡(2만여 평) 부지를 매입, 연와제 성당 신축에 들어갔다. 이어 2년 만인 1918년 중국인을 데려가 벽돌을 구울 가마를 설치해 본격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10월 완공했다. 당시 평안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그림 왼쪽 건물은 사제관이며, 이어 수녀원, 해성 유치원 등이 계속 지어졌다. 평안남ㆍ북도가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의 선교 전담지가 된 이후엔 의주성당이 교구 설정을 위한 거점이 된다. 1937년이 되면 교세가 신자 474명에 예비신자 105명, 유치원과 양로원을 운영하는 공동체로서 우뚝 선다. 하지만 이 본당 역시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과 함께 10대 주임 김교명 신부가 체포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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