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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을 말한다] (25)제5화 한국 교회건축의 반성과 대안- 한국교회건축의 토착화

[교회건축을 말한다] (25)제5화 한국 교회건축의 반성과 대안- 한국교회건축의 토착화

자연관과 정서 배려한 '한국적' 교회건축 방향 설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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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6 발행 [1198호]
자연관과 정서 배려한 '한국적' 교회건축 방향 설정해야

▲ 전북 완주군 화산면 승차리에 있는 되재성당. 1895년 서울 중림동약현덩당에 이어 두 번째로 완공된 성당으로 한강 이남에 처음 세워진 성당이며, 최초의 한옥성당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때 전소되고 1954년에 세운 공소 건물이 있었는데, 문화재로 지정된 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다.


  교회건축의 토착화는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사건부터 이야기돼야 한다.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372년), 백제가 침류왕 원년(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인 데 비해 신라는 이후 100년이 지나서야 불교를 받아들인다. 신라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 사건은 신라인들이 재래신앙에서 경배했던 신성한 '숲'이라는 자연에 불교가 요구하는 사찰을 '건축'하는 인위적인 일에서 빚어졌다. 불교는 공존의 방안으로 기존 신앙의 일부를 받아들여 산신각을 모든 사찰에 함께 세움으로써 토속신앙을 포용했다. 삼국이 모두 왕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국민 종교로 뿌리내리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소위 토착화에 성공한 것을 단재 신채호는 '조선의 불교, 불교의 조선'이라고 찬탄했다.

 라틴아메리카에 가톨릭이 이식된 지 500년이 지난 지금도 남미 페루의 오지마을에 가면 토속신앙과 혼재하는 가톨릭을 도처에서 본다. 집집마다 용마루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는데, 원주민들은 스페인에서 옮겨온 소들의 엄청난 노동력에 탄복해 십자가 양쪽에 황소를 한 마리씩 모셔놓았다. 어떤 집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병에 든 약을 먹고 신통하게 감기가 낫는 모습을 보고 십자가와 함께 그 약병을 경배하기도 했다. 이런 토착화는 유례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이뤄진 선교방식 때문일 터이다.

 이에 비하면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도착해 북경에 정착하기까지 6년 동안 중국어와 풍속을 익히고 중국어사전을 만들고 서양기술을 소개하는 책들을 저술해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이름도 이마두(利瑪竇)로 바꿨다(이<利>는 리치, 마두<瑪竇>는 마태오). 유교를 존중해 유생 복장을 했고, 과학자로서 '서양에서 온 존경할 선비'로 고관들 신임을 얻었다. 황제 부름을 받아 북경 거주허가를 받은 것도 황제가 그의 자명종 시계를 꼭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교와 가톨릭의 유사성을 찾아 경서에 나오는 상제(上帝) 개념을 천주(天主)로 설명하고, 공자와 조상 숭배도 용인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성공적으로 전교할 수 있었던 것은 가톨릭 선교사라는 자의식을 버리고 중국인을 존경하면서 철저히 준비한 까닭이었다. 그가 처음 북경에 지은 남천주교당은 철저히 중국식 건축양식이었다.

 반대로 한국 가톨릭은 외국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자체 신앙공동체를 형성했으나 기존 체제와 크게 충돌하면서 엄청난 비극을 낳았다. 게다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는 일방적으로 조상제사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 정조 임금은 즉위 초부터 서양의 과학기술을 앞세운 서학(西學)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서양인 신부를 초청하는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홍대용ㆍ박지원ㆍ이덕무ㆍ박제가 등 북학파 지성인들이 대부분 가톨릭 사상에 호의적이었음에도 박해라는 비극을 맞은 것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이 논쟁에 등장하는 이승훈ㆍ이벽 등은 정약용 형제와 관련된 사람들이었는데, 이 대표적 지성인들의 고뇌에 찬 행동을 배교(背敎)라는 단순 논리로 단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약용은 학문에서 조선 경학(經學)의 으뜸이요, 경세(經世)에서는 강병부국을 만들자던 선각자였다. 천주교를 둘러싼 논쟁은 정조대왕이 48살로 요절한 후에 일어난 당쟁의 결과였다. 다산이 천주교에 빠졌던 일을 '뉘우친' 것은 하느님 존재를 부인해 목숨을 부지하려는 차원의 배교가 아니었다. 그는 18년 유배가 풀린 후 여생을 깊은 신앙 속에 살았고, 병자성사를 받고 눈을 감았다. 가톨릭을 포용한 결과 다산의 정신세계는 평등주의와 민본 애민사상을 완성한 것이었다. 또한 깊은 신앙적 체험이 그의 학문에 녹아들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라도 가톨릭을 온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 강화도의 성공회성당. 서양식 장식이 없는 순수 한식 목조건물로 그리스도교의 한국 토착화 노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면 4칸·측면 10칸 규모의 2층 건물로, 목골조를 사용하고 벽돌을 쌓아올린 기와집이다. 로마 바실리카 양식을 본떠 2층은 바닥이 없는 통층 구조로 지었으나 외형은 불교 사찰 분위기를 풍긴다.


 한편 성공회는 늦게 이 땅에 들어와 비교적 쉽게 상륙했다. 그러나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는 이 일을 쉽게만 생각하지 않고 1900년 강화에 한국 최초로 한옥성당을 지었다. 진심으로 토착화에 힘쓴 3대 교구장 트롤로프 주교는 강화에 한옥성당을 건축하고 서울에 주교좌성당을 짓는 데 지극정성을 다했다. 당시 영국 본토에서 가장 명성을 떨치던 교회건축가 아더 딕슨을 초빙한 뒤 그에게 조선 사람들 정서를 감안해 교회 초기 건축양식인 로마네스크 스타일로 설계하고 세부 장식에서 조선 현지 양식을 채택해 달라고 했다. 이들의 토착화 노력은 약자를 살핀다는 면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앞서 실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파리외방전교회 블랑 주교와 코스트 신부가 지은 명동성당은 조선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건축을 강요했다. 고딕건축은 한국인의 자연관이나 건축정서에 맞지 않았으며, 높은 언덕에 너무 높이 지어져 왕궁을 내려다본다는 왕실 항의를 무시한 채 공사를 진행했다. 우리가 어렸을 적 서양인 신부를 따라 뜻도 알지 못하는 라틴말 미사용어들을 그저 따라만 했으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각 민족의 고유 언어로 미사를 드리기 전까지 사실상 우리 마음에 진심으로 와 닿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고딕건축이 정서적 배려없이 도입된 탓에 성당건축은 지금도 라틴어 미사처럼 우리 생활을 겉돌고 있다.

 때로 우리는 작은 시골공소 바닥에 퍼져 앉아 기도드릴 때 편안함을 느낀다. 건축 스케일 문제와 함께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과 마을 구성에 대해 배려해야 할 요소들을 건축가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국악 미사곡이 조용히 자리를 잡아가는 데 비해 우리 교회건축의 토착화는 아직 방향조차 못 잡고 있다. 그 오랜 신앙적 결실에 비해 건축의 토착화는 현재 개념설정도 미흡하고 요원하다.


김원(안드레아, <주>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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