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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35)] 17. 바젤-페라라-피렌체 1431~45<상>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35)] 17. 바젤-페라라-피렌체 1431~45<상>

후스전 종결, 동방교회와 재일치 등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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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3 발행 [1138호]
후스전 종결, 동방교회와 재일치 등 위해

▲ 1511년 에 발행된 「바젤 공의회 교령집」 속표지 그림.


**배경


 차기 공의회는 5년 후에 열어야 한다는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 결정에 따라, 교황 마르티노 5세(재위 1417~1431)는 1423년 4월 23일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키로 하고, 자신을 대리해 회의를 주재할 사절을 현지에 파견합니다. 하지만 개회식 참석자는 대수도원장 2명뿐이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 사람이 더 도착했지만 그 수가 25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페스트가 파비아를 덮쳤습니다.
 그러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 장소를 이탈리아 중부 시에나로 옮깁니다. 이번에는 공의회 우위설을 내세우는 다수파와 교황권을 옹호하는 소수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의가 흐지부지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결국 파비아-시에나 공의회는 '프레쿠엔스' 규정에 따라 다음 공의회를 7년 후인 1431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기로 하고 11개월 만에 해산합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공의회 우위설을 지지하는 쪽이 아니어서 바젤 공의회 개최에 대해서도 마뜩잖았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소집일이 다가오면서 규정대로 공의회를 개최하라는 압박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하는 수 없이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을 공의회 의장으로 임명하는 등 조치를 취합니다만 공의회가 열리기 직전에 선종합니다.
 후임 교황 에우제니오 4세(재위 1431~1447)도 공의회에 소극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간을 질질 끌다가 예정보다 4개월이나 늦은 7월 23일 공의회를 개최합니다.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라고 부르는 17번째 세계 공의회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교회 개혁, 얀 후스 추종자들인 후스파가 일으킨 후스 전쟁의 종결, 유럽 각국 간 평화 정착, 동방 교회와 재일치 등이 주요 목표였습니다.
 
**공의회 개최와 경과  

 바젤 주교좌성당에서 개막한 공의회는 처음에는 주교가 한 사람도 없었을 정도로 참석자가 적었습니다. 게다가 개회식 당시 체사리니 추기경은 후스 전쟁에 참가하느라 바젤에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대리가 개회식을 주재했습니다. 체사리니 추기경이 두어 달 늦은 1431년 9월 바젤에 도착했을 때도 참석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그해 12월 바젤 공의회를 해산하고 18개월 후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는 칙령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바젤에서는 체사리니 추기경 주재로 공의회 첫 회기가 이미 시작된 상황이었습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교황 칙령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회의를 속개한 교부들은 1432년 2월 2차 회기에서 공의회 우위설을 재확인하면서 교황이 회기 중에 있는 공의회에 대해 공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회의 장소를 옮기거나 해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독일 왕 지기스문트를 비롯해 부르군디와 영국, 밀라노 등 유럽 여러 나라 군주들도 공의회를 지지했습니다.
 힘을 얻은 공의회 교부들은 그해 4월 제3차 회기에서 교황에게 공의회 해산 칙령을 철회하는 것은 물론 3개월 이내에 직접 또는 대리인을 통해 바젤로 출두하라고 통보합니다. 이런 상황이 2년 가까이 계속됩니다.
 그 사이에 공의회 교부들은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성사시킵니다. 후스 전쟁으로 10여 년간 중부 유럽을 위험에 빠뜨렸던 후스파와 1433년 11월 프라하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입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후스파가 요구한 사항들 중 평신도에게도 성혈을 영할 수 있게 해주는 등 몇 가지 조건에 합의함으로써 타협을 이뤄냈습니다.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성체와 성혈을 함께 영하는 것)는 15세기 초 보헤미아 지방에서 널리 이뤄지던 관습이었는데 콘스탄츠 공의회가 1415년 보헤미아 지도자 얀 후스를 단죄하면서 양형 영성체를 금지시켰습니다. 이 조치는 후스의 화형과 함께 후스파가 봉기한 한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츠 공의회가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를 금지시킨 것은 양형 영성체가 단지 교회 전통과 관습에 어긋나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양형 영성체 관습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구원된다'는 성경 말씀(요한 6,56 참조)을 글자 그대로 따르는 데서 비롯한 것이어서, 성체만 모셔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다 모시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는 교회 가르침을 거부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의회는 교회 가르침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양형 영성체를 허용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바젤 공의회가 난제였던 후스 전쟁을 종식시키는 성과를 거두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자신의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황은 1433년 12월 바젤 공의회에 대한 해산 명령을 철회하고 공의회 속개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칙서를 발표합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제 공의회 우위설을 바탕으로 개혁안들을 계속 마련합니다. 교구 및 관구 회의의 정례적 개최, 성직자의 축첩 및 성직 매매 금지, 성무집행 정지의 난발 금지 등 같은 주목할 만한 내용도 있었지만 교황 권한을 축소하는 조치들이 더 많았습니다. 교황 선거법을 일부 개정하고 추기경 수도 24명으로 제한했습니다.
 이에 앞서 공의회 교부들은 이미 1432년에 공의회 의사 규정을 바꿔 종전에는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에게만 주던 투표권을 신학자, 대학교수, 수도자와 본당 신부들에게도 허용했습니다.
 한편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4년 여름부터는 로마 소요 사태를 피해 피렌체에 와 있었습니다. 교황은 바젤 공의회가 못마땅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계기가 왔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략 위협에 시달리던 동로마 황제 요한 8세 팔레올로구스가 동ㆍ서 교회의 재일치를 바탕으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자 교회 일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사절을 보낸 것입니다.
 문제는 회의 개최지였습니다. 바젤 공의회와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각기 서로 다른 장소를 제안했습니다. 동방 교회쪽에서는 교황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젤 공의회에서 이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공의회는 기존 장소를 고수하는 다수파와 교황의 제안을 지지하는 소수파로 갈라졌습니다. 교황은 소수파의 입장을 승인합니다.
 바젤 공의회의 다수파가 책임을 묻고자 교황을 소환하려 하자 교황은 이에 맞서 공의회를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로 옮길 것을 선언합니다. 1437년 9월이었습니다. 소수파는 교황 뜻을 따라 페라라로 옮겨 이듬해 1월 페라라에서 공의회를 속개합니다. 다수파는 바젤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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