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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1) 명례방 공동체와 명동성당

명동성당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1) 명례방 공동체와 명동성당

1898년 종현 언덕에 천주당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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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5 발행 [1134호]

   16일 기공식을 가진 명동성당 종합계획(1단계)에 따라 한국교회 1번지 명동성당 지형이 크게 바뀔 전망이다. 명동성당은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얼굴로, 한국 교회사는 물론 격동의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 우뚝 서 시대와 고락을 함께해왔다.
 명동성당 종합계획 기공식을 계기로 명동성당의 지나온 발자취를 연재한다. 명동성당이 한국교회사에 남긴 흔적은 한국교회 자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은 한국교회 첫 번째 본당이다. 한국교회 첫 본당이 어떤 연유로 명동에 세워지게 됐을까.

 그것은 한국교회 출발지가 다름 아닌 명동이었기 때문이다.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함으로써 한국교회가 시작된 1784년으로 돌아가 보자.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은 이벽(요한 세례자)은 수표교(현 서울 중구 수표동 소재) 부근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교리공부를 하고 전교활동을 하다가 신자들이 늘어나자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토마스) 집을 공동체 삼아 집회를 이어나갔다. 한국교회 최초 신앙 공동체였던 명례방 공동체는 1785년 봄 조정에 적발되면서 와해되고 만다.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명례방이 바로 지금의 명동이다.

 김범우 집이 있던 명례방 장악원 옆 종현 언덕에 성당 신축을 추진한 것은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전교 자유가 인정되면서부터다. 당시 조선 전교를 책임지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블랑(제7대 조선교구장) 주교는 종현 지역 가옥과 대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성당과 주교관을 비롯한 교회 시설들을 세움으로써 종현을 한국교회 중심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블랑 주교가 이 지역을 선택한 데는 명례방이 한국교회 탄생지라는 역사적 배경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더불어 명례방이 서울 중심인 데다 특히 종현은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이라는 입지적 조건도 크게 반영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1888년 명동성당 구내에 세워진 첫 건물은 성당이 아니라 성당이 완공되기까지 경당과 사제들 임시 숙소로 사용된 인쇄소 건물이다. 이듬해인 1889년에 완공된 주교관(현 서울대교구청 사무처 및 관리국 건물)은 교회행정 중심지로서 명동성당을 비롯한 각종 교회 건물을 설계하고 공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초창기 교회 건축의 산실이 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이 건물에 대해 "2층 건물인데 비록 매우 수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조선인 교우 모두는 이를 감탄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기록했다.

 성당을 짓기 위해 언덕을 깎는 정지 작업은 1887년 겨울에 시작됐다. 블랑 주교는 팔을 걷어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선 신자들의 신앙적 열성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으로 추위에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 열성으로 시작된 명동성당 신축 공사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게 된다. 성당 설계와 공사 지휘는 주교관을 설계한 꼬스트 신부가 했다. 그는 약현(현 중림동약현)성당과 용산 신학교 설계 감독도 맡는다. 공사는 1898년까지 6년 동안 진행됐으며,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6만 달러가 들었다.

 유학자 황현(1855~1910)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명동성당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남부의 종현은 명동과 저동 사이에 있는데, 지대가 높고 전망이 좋은 곳이다. 윤정현의 집이 그 마루턱에 있었는데, 10여 년 전 서양인이 이를 구입하여 철거하고는 평지를 만들어 교회당을 세워 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집이 높고 우뚝하여 산을 자른 듯한데 낮이나 밤이나 남녀 영세자들이 북적이니 마치 저잣거리 같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 왼편으로 1889년에 완공된 주교관이 보인다. 명동성당 신축 공사가 시작되기 전 모습이다.
▲ 명동성당 건립에 앞서 1888년 성당 구내에 처음으로 세워진 인쇄소 건물로, 경당 겸 사제 숙소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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