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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 최창현(요한, 1759~1801)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 최창현(요한, 1759~1801)

역관 출신으로 교회서적 번역, 성직자 영입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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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4 발행 [1129호]
역관 출신으로 교회서적 번역, 성직자 영입 앞장

▲ 최창현은 모진 고문에 굴복하지 않고 "천주와 예수를 위해 죽겠다"며 순교의 길을 택했다. 사진은 최창현을 비롯한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순교혼이 서려 있는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저는 20년 동안 사학(邪學, 천주학)에 미혹되어 지금에 이르렀으니 후회막급입니다."

 의금부로 압송된 최창현(요한)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의금부 추관((推官)의 서슬 퍼런 추문(推問)과 나졸들의 육모방망이 매질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최창현이 뭔가를 숨기는 듯 하거나 대답을 우물쭈물하면 어김없이 매질이 시작됐다. 육모방망이의 각진 곳이 어깨와 등짝을 강타할 때마다 그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다 정신을 잃었다.

 그는 결국 "천주 야소(耶蘇, 예수)를 결단코 원수로 보고 이적금수(夷狄禽獸, 오랑캐)의 도로 보겠다"(1801년 2월 11일 의금부 「추안 및 추국」 기록)며 배교의사를 밝혔다. 그는 신유박해(1801년) 당시 의금부가 사학의 우두머리(총회장)로 지목한 핵심 인물이었다.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과 함께 공부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11살 난 어린 아들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정조와 시파(時派)에 원한을 품은 노론계 벽파(僻派) 사람이었던 대왕대비는 곧바로 정적(政敵)인 친정조 세력을 향해 복수의 칼을 빼들었다.

 시파에는 서학(西學)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많았다. 선왕 정조도 조정 대신들이 중국을 통해 유입되는 천주교에 대한 우려를 제기할 때마다 "정학(正學, 유학)이 밝아지면 사학은 저절로 종식된다"며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순왕후가 주도한 신유박해는 천주교 엄금을 빙자해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 보복적 색채가 농후했다.

 대왕대비는 신유년이 밝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해령을 포고했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는 까닭이오, 나라가 나라 노릇을 하는 것은 교화가 있는 까닭이다. 이른바 사학은 무부무군(無父無君)하여 인륜을 파괴하고 교화를 배반함으로써 스스로 이적금수로 돌아갔다…"

 천주교 박해의 빌미는 무부무군의 죄였다. 서학은 천륜을 망각해 조상제사를 거부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며 임금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요망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치국의 원리이자 사회질서 근간인 유교와 그 갈래인 성리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때부터 박해의 불길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최창현은 의금부에서 "1784년 겨울 이벽에게서 요서(妖書, 천주교 서적)를 얻어 보았으며 정약전ㆍ정약용ㆍ권일신 등과 함께 그걸 갖고 공부했다"고 실토했다. 의금부는 그를 통해 사학의 세력을 뿌리뽑을 작정이었다. 더구나 정약종의 집에서 발견된 천주 화상(畵像, 비단 등에 그린 성화)이 최창현의 집에서 만들어 보낸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초가 이어졌다.

 "정약종에게 보낸 비단 휘장은 어디에 쓰던 물건인가?"
 "천주께 첨례(瞻禮)하는 날에 휘장을 설치하고 천주상을 건 다음 무릎을 꿇고 서적을 외우면서 천주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네가 사학에 빠진 것이 꽤 오래되었고, 도당이 아주 많으니 소굴과 교주를 모를 리 없다. 소굴 주인을 진실로 모르냐?"
 "모릅니다."

 추관은 최창현에 대한 추문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의견을 덧붙였다.

 "죄인 최창현은 실로 이 옥사의 핵심입니다. 천주 화상, 비단 장막과 도구들은 그의 집에서 만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소굴과 맥락을 어찌 누구인지 알지 못하겠습니까? 반은 숨기고 반은 말하니 실로 극히 악랄합니다. 청컨대 다시 엄벌하시어 사실을 얻어내도록 하소서."(의금부 「추안 및 추국」 기록 참조)

「성경광익」 「성경직해」등 번역
 
 최창현은 한양 입정동(현 서울 중구 입정동)에 있는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역관은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과 통역 업무를 맡아보던 중인계층이다.

 그는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1784년 9월 이벽 등에게 세례를 주면서 신앙 공동체를 세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했는데, 특히 통번역을 업으로 하는 역관답게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열중했다.

 한글본 「성경광익」 「성경직해」 「성경직해광익」 등이 그가 번역한 것
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성경직해」는 미사 중에 봉독되는 4복음서의 30.6%에 해당하는 분량이 수록돼 있어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천주교 신앙과 복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천주교는 18세기 후반 양반 지식층뿐만 아니라 중인 이하 일반 백성에게도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불평등한 신분제도가 급격히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접하게 된 그리스도교의 인간 평등사상과 하느님(天帝) 존재는 곧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식층은 천주교를 서양 학문 차원으로 이해하고, 이를 일종의 민중종교운동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한글교리서는 천주교 확산에 큰 기여를 했다.

 "충청도 일대에서는 서양에서 유래한 일종의 사설(邪說)을 거의 집집마다 외우고 전하기에 이르러서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고 베껴 옮겨 아래로는 부녀자와 아이들에게까지 이르렀다."(이규경의 「척사교변증설」 하 705쪽)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농부와 무지한 시골 아낙네라 하더라도 그 책을 언문으로 베껴 신명(神明)처럼 받들면서 혹은 일을 그만두고서는 외우고 익혀서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데 이르렀습니다."(「승정원일기」 87권 655쪽)

 다블뤼 주교는 "최창현은 평상시의 근면함으로 조선에 들어온 모든 천주교 서적들을 베껴 썼는데, 이 일은 그가 항상 몰두하는 일이어서 천주교인들은 서적을 구하려면 큰 상점에 문의하듯이 그에게 말만 하면 될 정도였다"(「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109쪽)고 전한다.

 1791년 조상제사 문제로 인해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일부 양반들이 천주교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창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 공동체를 지켰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에도 앞장섰다. 마침내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총회장으로 임명돼 공동체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했다.

 「황사영 백서」에 기록된 최창현은 겸손하고 신자들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실천형 지도자였다.

 "그는 몸가짐이 평화롭고 언행이 공정하며 정의롭습니다. 도리에 대한 강론도 자세하고 분명해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그의 순명과 겸손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남보다 특별히 뛰어난 점도 없지만, 흠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교우들 중에서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최창현이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천주교 교리가 진리임을 알리는 내용의 호교문을 쓰고 있다.(그림/탁희성 화백)

"천주와 예수를 위해 죽겠습니다"

 그는 박해령이 내려지자 그 폭풍을 예감하고 신자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지병이 있어 잠시 집에 들렀다가 밀고자 김여삼이 데리고 온 포도대장에게 체포됐다.

 그는 의금부로 이송돼 혹독한 문초와 고문을 받았다. 중인 신분인 데다, 정약용이 "최창현은 괴수의 우두머리이고, 황사영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치 않으니 비록 조카사위라도 곧 원수이다"라고 진술한 터라 매질은 더욱 가혹했다.

 그럼에도 그는 추관이 얻어내고자 하는 진술을 끝까지 거부했다. 이미 순교를 결심한 터였다. 그는 추문 초기에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정약용이 저를 괴수로 지목하였지만 저는 지목할 사람이 없으니 죽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제 천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전날 천주를 배반했던 것을 통절히 뉘우치면서 죽고자 할 따름입니다. 지목할 사람은 없습니다."(2월 13일 의금부 「추안 및 추국」 기록)

 이날 이후로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없다. 「순조실록」과 「벽위편」에 남아 있는 기록만이 그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장렬히 순교의 칼을 받았음을 전해준다. 그의 나이 42살이었다.

 "죄인 최창현은 사학 서적에 고혹되어 정약종ㆍ권철신 등을 대부로 존중하고…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결안을 써서 바쳤으므로, 요사한 말과 요사한 글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대중을 미혹시켰다는 사실을 자복 받아 정법(사형)하였다."(「순조실록」 권2, 2월 26일)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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