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천주교 기행] 김연수 신부 "한국전쟁 후 죽음의 행진, 성직자·수도자 연행"

[북한 천주교 기행] 김연수 신부 "한국전쟁 후 죽음의 행진, 성직자·수도자 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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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업데이트 : 2019-06-07 18:58

○ 방송 : cpbc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 진행 : 윤재선 앵커
○ 출연 : 예수회 김연수 신부


매주 금요일에 전해드리는 코너죠.

<북한 천주교 기행> 시간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교회는 더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난 주에는 북한정권 수립 후 천주교 박해 상황과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알아봤는데요.

오늘은 한국전쟁 시 교회의 인적 물적인 피해 상황을 알아보고, 연행되어간 선교사들과 수도자들이 어떻게 고난을 당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회 민족화해위원장 김연수 신부님과 함께 합니다.



▷ 신부님 안녕하세요. 프로그램 개편 후 처음 만나뵙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한의 모든 성당이 폐쇄되고 수도원은 해산되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연행 되어 갔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상황은 어땠나요? 북한에 사제나 수도자들이 남아 있었나요?

▶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한에 남아 있던 한국인 신부는 모두 21명이었습니다. 북한 지역에 남아 있던 성직자들은 6월 24일과 25일에 대부분이 체포되었구요. 4명의 신부들이 비밀리에 숨어 지내다가 1·4 후퇴 직전에 월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북한에는 활동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성직자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더 이상 성사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피난을 가지 못한 수도자들과 신자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 천주교 신자들 역시 연행 되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특히 성직자들의 가족들과 반공을 강하게 주장하던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직자 가족 중에 10월 17일 장연본당의 강주희 신부의 가족들이 죽임을 당했구요. 황해도 매화동 본당의 경우는 1950년 10월 15일, 김정자, 김정숙 수녀들과 함께 50-60명의 신자들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피난을 가지 못한 수녀님들이 많은 피해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한국전쟁 전에 이미 수녀회가 강제 해산되어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는 파악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 역시 많은 피해를 받았지만 기록의 부족으로 파악이 어렵습니다.



▷ 북쪽 지역 성당 건물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 성당 건물에 대한 피해는 전쟁 전부터 북한당국에 의해 폐쇄 되거나 몰수당하면서 진행되어 왔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요. 실질적인 피해는 전쟁이 발발하고 휴전 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연합군의 무차별한 폭격에 의해 성당이 파괴되고 소실되었습니다.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성당은 북한 당국에 의해 다른 용도로 전용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손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교회 건물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사용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을 것입니다.



▷ 인민군이 남쪽을 점령하면서 남한 천주교 역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겠죠?

▶ 남한 가톨릭교회의 피해 범위나 규모는 북쪽 지역 보다 더 넓고 컸습니다. 그 이유는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한 대구교구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울교구는 전쟁이 일어나고 이튿날 26일 긴급 교구 평의회를 열고 시내 각 본당 신부들은 남아 있어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 하라고 결정을 합니다.



▷ 그래서 사제들이 그 지침을 따랐나요?

▶ 예, 그렇습니다. 본당을 담당하고 있던 신부들은 신자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하고 피난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서울교구는 꽤 오랫동안 본당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할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성직자들이 계속 본당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희생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 7월 3일 서울 도림동 본당의 이현종 보좌 신부가 북한군에게 총살당했는데요. 서울교구 성직자로는 첫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춘천교구와 광주교구에는 대부분 골롬반회 신부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피난을 가지 않고 잔류하였다가 연행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북쪽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전주교구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많은 인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 그때 당시 패트릭 번 주교님이 교황대사로 역임하고 계셨는데 전쟁 때 연행되어 가셨잖아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 교황대사 번(Patrick J. Byrne)주교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이 곧 끝날 거라고 낙관하였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이 빠르게 남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외국인 신부들과 수도자들에게 피난을 가도록 명령하고 그는 피난을 가지 않고 명동성당 주교관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7월 11일 그의 비서 부스(William Booth) 신부와 함께 연행되었고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혹독하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식으로 인민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되었습니다.



▷ 인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물적인 피해도 컸을 것 같습니다.

▶ 예, 그렇습니다. 한국전쟁 시 남한 지역에서 성당 27개 공소 3개, 사제관 2개, 학교 3개, 수녀원 1개가 손실 되었습니다.



▷ 당시 북한 지역에서 성직자 수도자들이 연행되어 갔고, 남쪽 지역에서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연행되어 북쪽으로 이송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들이 죽음의 행진이라고 표현할 만큼 혹독한 이동 생활을 했다면서요?

▶ 말씀하신대로 북한과 남한 지역에서 연행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1950년 9월 유엔군이 북진함에 따라 압록강을 향하여 북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 행진은 전쟁이 끝나는 1953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북한의 혹한의 날씨에 심한 노동, 고문, 기아와 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끌려가던 포로들은 지속된 이 이동을 ‘죽음의 행진’(Death March, March Till they Die)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음의 행진은 남한에서 끌려간 포로들과 북한에서 연행되어간 포로들을 구분하여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습니다. 교황대사 번 주교는 이동을 하는 동안 1950년 11월 25일 추위와 병으로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 죽음의 행진은 상상 할 수 없는 혹독한 이동이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하는 동안 죽음을 맞이했네요. 그 중에 살아 돌아오신 분이 계신가요?

▶ 예, 그렇습니다. 북한 지역에서 체포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59명이었는데요. 그중에 17명이 사망하고, 42명이 1954년 1월 24일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쪽 지역에서 연행되어 갔던 이들도 번 주교의 비서 부스 신부를 비롯해서 소수가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 전쟁 기간 동안 아니 그 전부터 천주교 피해가 컸네요.
특히 천주교가 탄압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천주교는 강한 반공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공산당 정권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신자들과 운명을 같이 하려고 본당에 남아서 계속 활동하였기 때문입니다.



▷ 전쟁은 서로 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천주교 안에는 반공의식이 강화되었을 것 같은데요.

▶ 서로 죽고 죽였던,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들에 대한 박해는 천주교 안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이 상처는 남한 가톨릭교회 안에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반공주의는 남한 가톨릭 신자들 안에 더욱 깊이 내면화 되었고,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반공주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마저 말살시켜버렸습니다



▷ 매주 금요일에 전해드리는 <북한 천주교 기행>. 예수회 민족화해위원장 김연수 신부님과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cpbc 김유리 기자(lucia@cpbc.co.kr) | 최종업데이트 : 2019-06-07 18:58

■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pbc 가톨릭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윤재선입니다>'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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