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112주년 ①] 국채보상운동 의의와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국채보상운동112주년 ①] 국채보상운동 의의와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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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업데이트 : 2019-02-26 03:00


[앵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요.

동시에 일제의 침탈에 맞서 나라 경제를 수호하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일어난 지 112년째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상공인과 지식인부터 백정과 걸인, 심지어 도적까지 온 국민이 나서서 나라 빚 1300만원을 갚기 위해 힘을 모았는데요.

지난 21일, 이학주 기자가 국채보상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습니다.

[기자] 함께 맞잡은 줄을 당기자 흰 천이 걷히고, 기념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국채보상운동 112주년을 맞아 세운 기념비입니다.

기념비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500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습니다.

기록물은 1907년부터 3년 동안 진행된 국채보상운동의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1907년 2월 21일, 대구 서문시장 인근 북후정에서 대구군민대회가 열렸습니다.

출판사 광문사의 사장인 김광제 선생과 부사장 서상돈 선생은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처음으로 낭독했습니다.

"2천만 국민이 3달 동안 담배를 끊어 일본이 떠넘긴 국채 1300만원을 갚자"고 호소했습니다.

1300만원은 당시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막대한 금액이었지만 시민들은 열렬한 호응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이내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관료와 선비부터 나무꾼과 백정, 걸인 심지어 도적까지.

억울하게 진 나라 빚을 갚기 위해 국민 4명 중 1명이 동참했습니다.

양반 부녀자부터 기생까지, 많은 여성들도 패물을 팔아 번 돈을 보탰습니다.

고종황제와 해외동포도 뜻을 함께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도 물론 국채보상운동을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도 그 중 한 명입니다.

<김영철 교수/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안중근 의사께서 관서지방에 국채보상운동을 전체적으로 조직을 했고, 어머님(조마리아 여사)과 여러 가지 가족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선생도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자였습니다.

<김영철 교수/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서상돈 선생은) 처음에 국채보상운동 발기인으로 참가했고요. 또 이런 운동을 국민적으로 알려내는데 굉장히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서 선생은 대구에서 보부상으로 활동했습니다.

특유의 근면함과 대구 신자들의 도움으로 15년 만에 대구 제일의 거상으로 성장했습니다.

서 선생은 재산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대구 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납했습니다.

계산성당을 건립하고, 대구 최초의 근대식 서양교육기관인 해성재를 설립하는 데도 선생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런 그는 나라 빚을 갚기 위해 가장 먼저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작성하고, 80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았습니다.

서 선생이 보여준 나눔 정신이 국채보상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부는 그 공로를 인정해 1999년 광복절, 서상돈 선생에게 건국훈장 4등급인 애족장을 수여했습니다.

온 국민이 힘을 모은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은 3·1운동과 물산장려운동으로 이어졌고, 독립운동의 발판이 됐습니다.

cpbc 이학주입니다.
cpbc 서종빈 기자(binseo@cpbc.co.kr) | 최종업데이트 : 2019-02-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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